1. 바티칸 투어
시차적응을 못해 어제 오후내내 졸려죽겠다면 매달리던 진아가 난방문제로 프런트와 실랑이하던 사이에 곯아떨어져버리더니 밤새 꼼짝않고 단잠을 잔 모양이다. 오늘은 바티칸 투어와 함께 호스텔 체크아웃을 해야하기에 짐도 정리하려면 어제보다 일찍 서둘러야 했다. 아이들에게 우선 세면부터 하게 한 다음 프런트에 가서 다시 난방문제를 제기하면서 어차피 일정대로 이틀간 묵었으나 당초의 서비스 수준과 맞지않으니 일부 숙박료 환불을 요청하였다. Domitory가 아닌 가족실을 예약하면서 20%이상의 방값을 추가로 지불하였으나 난방이 제대로 되지않아 샤워도 제대로 못하고 밤새 추위에 떨어야 했으니 Domitory수준으로 방값을 계산하여 차액한불을 요청해놓고 방으로 올라왔다. 아이들은 벌써 자기가 맡은 짐을 모두 정리하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짐을 들고 프런트로 내려와 짐보관장소에 트렁크와 작은 배낭을 와이어와 자물쇠로 단단히 단도리하고 한국에서 사가지고 간 미역국과 햇반, 그리고 숙소에서 제공하는 빵과 카스테라로 아침을 마감하고 나니 대략 아침7시 반이 넘어가고 있었다. 서둘러 Termini역에서 지하철로 바티칸박물관과 인접한 Ottabiano역으로 갔다. 자전거 나라와 8시반까지 이 역에서 합류하기로 예약되어 있다. 우리가 도착하여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하나밖에 없는 출구로 가이드와 그를 뒤따라오는 오늘의 일행과 조인트하였다. 우리 일행들은 곧바로 바티칸박물관 입구로 거의 뛰다시피 종종걸음으로 가이드 뒤를 좆았다. 원래 박물관 개관은 아침 9시부터 오후3시 까지인데 8시 40인 시각인데도 매표소 앞에서 기다리는 줄이 거의 500미터가량 늘어져 있다.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 가이드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오늘 참석을 예약한 명단과 일일이 출석 점검도 하고 학생과 일반을 나누어 국제 학생증과 입장료를 걷어서 정리하는 등 무척이나 바쁘다. 작년에 있었던 9.11테러의 영향인지 입구에서의 검색이 제법 공항에서의 출국심사를 방불케 한다. 박물관에 들어서서 다시 인원점검을 하고 오늘의 일정과 유의사항등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을 들었다. 라파엘로의 복도에서 시작하는 오늘의 투어는 라파엘로의 방과 그리스 조각, 시스티나예배당의 최후의 심판을 마지막으로 박물관투어를 끝내고 성베드로 성당으로 장소를 옮겨 베드로 성당 내부와 성당위의 코폴라 관람을 끝으로 투어일정이 마감된다고 한다. 투어인원이 거의 25명에 육박하여 일사불란하게 가이드의 안내를 따르지 못하면 시간에 쫒기는 투어가 되니 적극 협조하여 달라는 간곡한 당부의 말을 끝으로 우리는 바티칸 박물관 투어를 시작하였다.
2. 서양화의 시작은?
나는 미술에 대해서 무지한 문외한으로 오늘 오전은 별 흥미없는 투어가 되겠구나 하는 선입견을 가지고 가이드의 뒤를 따라 라파엘로의 방으로 이어지는 라파엘로의 복도로 들어섰다. 미술에 문외한에다 기독교에 대한 호감과는 왠지 물과 기름같은 감정적 괴리까지 합세되고 보니 가이드가 시작한 서양화의 시작이 되는 성경에 기초한 성화에 대한 설명에 전혀 귀가 경도되지 않았다. 무리의 맨 뒤에서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가에 더 관심을 두고 별반 흥미없이 맹목적하여 각 방을 옮겨갔다. 어차피 바티칸에서 봐야 할 것은 미켈랄젤로의 천장화하고 베드로 성당이 전부라는 것이 재작년 출장에서 정리된 나의 단견이니 선입견이 가져다 준 오늘의 손실이 커질 소지가 다분할 뻔하였다.
라파엘로의 방으로 이어지는 회화관에서 시작한 자전거나라의 설명은 시시콜콜한 미술시간쯤으로 여기고 별반 관심없이 일행을 좆아가다가 지오토의 프로스코화 기법에서 갑자기 호기심이 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 호기심이 결국 서양화의 시작에서부터 르네상스의 전성기까지를 두루 섭렵하고 성화에 나오는 각각의 인물마다 화가들이 정해놓은 특징마져 알게되었다. 여행을 지속적으로 활력있게 만드는 것은 끝없는 호기심이 우선되어야 하는 것일까?
지오토에 의해서 시작된 프레스코화는 소석회(消石灰)에 모래를 섞은 모르타르를 벽면에 바르고 수분이 있는 동안 채색하여 완성하는 회화의 한 기풍으로서 색채가 수분을 타고 번지지않게 하여야함과 동시에 수분이 마르기 전에 그림을 완성해야 하므로 상당한 노력과 시간이 소요된다. 이렇게 완성한 그림은 상당한 세월이 흘러도 원색이 그대로 살아있는 효과가 있으므로 당시의 화가들은 성화의 영원함을 함께 기리는 신앙심이 함께 흠뻑 배어있는 그림을 그리면서도 그 고통을 감내해냈으리라. 지오토의 프로스코화는 여러 화가들을 거쳐 라파엘로와 미켈란젤로에 이르러 그 풍성한 꽃을 피워내게 되었다.
라파엘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함께 르네상스의 고전적 예술을 완성한 3대 천재 예술가의 한 사람이다. 페루지노의 조수로서 그림을 배운 그의 화풍은 부드럽고 환한 색채에서 맑고 밝은 인물과 배경이 주종을 이루어 보는이에게 평안함과 고요함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아울러 피라미드 구도가 주는 안정적인 분위기에 이분법적인 화면 구도로 좌우 혹은 상하가 극명하게 대조되는 색채 사용하여 성경에 나오는 인물 혹은 줄거리들의 묘사에서 선과 악 혹은 비극과 희망을 함께 화폭에 담는 방법을 주로 썼다는 자못 긴 설명을 이어가며 가이드로서의 열의와 열정에 내가 어느덧 푹 빠져있슴을 깨달았다.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는 성경에 나와 있는 성인들이 주로 묘사의 대상이 된다. 이런 성화 표현된 성인들은 저마다 표현의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들어 양손에 성경과 펜을 들고 있는 요한, 성경과 지팡이를 잡고 있는 야곱, 성경과 십자가를 잡고 있는 안드레야, 성경과 칼을 잡고 무서운 표정을 하고있는 바울, 성경과 열쇠를 손에들고 있는 베드로 그리고 늘 검지손가락으로 뭔가를 확인하려는 모습으로 그려진 유다처럼.. 그리고 예수와 성모마리아의 머리 뒤에는 늘 금으로 표현된 후광이 그려져 신성시하는 모습을 표현해 냄과 함께 예수의 모습과 성모 마리아의 모습에서 나이로 모자관계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마리아가 무척이나 젊게 표현되어 왔다. 사실보다 예수의 고행을 극적으로 과장시켰고 동정녀 마리아의 모습은 처녀와 흡사한 젊은 모습이 주종을 이루었다.
다만 이 르네상스 시대에 이런한 풍조에서 벗어나 좀더 사실적으로 접근한 화가를 만날 수 있었다. 라파엘로의 방에 걸려있는 그림을 거의 다볼 무렵에 만난 카라바조의 작품 ‘그리스도의 매장’에는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깡마르고 온몸이 못질과 가시관으로 피투성이 예수보다는 몸에 적당히 붙어있는 근육과 살, 미미하게 묘사된 못질자국이 보이고 그 옆에는 할머니에 가까운 얼굴에 깊은 슬픔이 담긴 마리아의 모습이 그리져 있다. 또 마리아의 뒤를따르며 경악과 분노를 드러내며 소리치는 예수의 여동생 등의 표현은 당시의 다른 작품과는 사뭇 다른 풍의 회화를 구사하였는데 이 작가의 생애동안은 무척이나 불우하였다고 한다.
우리 아이들도 열심으로 설명을 들어가며 메모까지 해대고 있었다. 기특한 마음과 함께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으면 하는 바람으로 가이드와 우리 아이들에게 번갈아 가며 눈길을 바삐 움직여야 하였다. 어제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시차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강행군을 해냈으면서도 오늘 다시 이어지는 강행군에 열성으로 투어에 동행하고 있는 모습이 대견스럽기까지하다.
가이드의 설명을 열심히 적고있는 진아 |
가이드의 설명을 머리로 메모중인 진만 |
회화관을 나와 커다란 솔방울이 상징처럼 서있는 솔방울 광장에서 잠시 숨을 돌렸다. 그리고 시스티나 예배당안에서는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을 설명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이 광장 여러 곳에 걸려있는 설명용 사진들로 앞에 놓고 이들 작품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한다. 잠시간의 여유시간 동안 여기저기 광장을 돌아다니며 아이들과 몇 장의 사진을 찍고 다시 모여 이들 작품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미켈란젤로에 얽킨 얘기와 천지창조 완성과정에서 보여준 인간승리다운 휴먼스토리는 작품의 위대함에 앞서 우리를 경건하게 햐여준다.
설명을 마치고 Pio-Clementino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스 로마시대의 조각을 전시하고 있는 마치 안뜰처럼 꾸며진 미술관으로 미술시간, 혹은 세계사 시간에 책에 많이 게재되곤하던 작품들이 많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인간의 고통과 분노를 극적으로 표현한 라오콘상은 많은 투어참가자의 눈을 오랬동안 잡아놓고 있었다. 아폴론의 사제인 라오콘이 트로이 목마의 계략을 발설하였다는이유로 신의 저주를 받아 큰 뱀에게 온몸이 졸려 죽기 직전의 라오콘과 두아들의 처참한 고통은 표현한 이 작품은 시대의 공간을 뛰어넘어 지금도 작가의 의도를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다. 라오콘상의 맞은편 전시관에는 메두사의 머리를 당당히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가 서있는데 머리카락을 잡고 서있는 이 동상의 무게중심과 균형을 어떻게 잡았을까? 머리카락을 잡고 있는 손가락에 머리무게를 견디는 힘을 어떤 산술적인 계산을 염두에 두고 조각하였는지 궁금증마져 자아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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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차질은 빚은 현금예산
조각관 투어를 마치고 박물관 내에 있는 식당에 들러 점심을 먹을 차례가 되었다. 빵하고 우유를 시켜서 간단히 요기를 때우면서 아이들한테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먹고 싶어하는 것을 넉넉하게 사주지 못하게 된 형편에 마음이 아파왔다.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예상 소요비용까지 꼼꼼하게 뽑아본 다음 이라크와 미국간의 전운이 감돌아 유가불안에다 북한 핵문제와 국내경기의 불황이 겹치자 국제 원/달러 환율이 계속하여 오르고 있어 가능하면 환전차액이라도 아껴야 되겠다는 생각에 유로 현금으로 사용할 예상금액에 예비로 100유로를 더하여 총 450유로를 환전하여 왔다. 예상비용을 뽑을 당시 방문국이 대부분 선진국이기 때문에 신용카드가 일반화되어 있을 것으로 예상하여 모든 숙박비와 식사비는 모두 신용카드로 결제하는 것으로 구분하고 각종 입장료와 간식비, 시내 교통비를 현금으로 지불하는 것으로 하여 환전액을 정하였던 것인데.. 아뿔사!
그제저녁에 호스텔 체크인할 때부터 차질이 발생하고 말았다. 신용카드는 받지 않는다고 한다. 하여 거금138유로를 현금으로 결제할 수밖에 없었다. 또 어제 점심에 식당에 다시 30유로를 현금으로 지불하고 오늘 점심도 바티칸 내에는 신용카드가 되지않아 현금으로 지불하는 등 여행시작 이틀만에 이것 저것하여 250유로 가까운 현금을 소진하고 말았던 것이다. 스위스와 파리를 거쳐 런던으로 넘어가는 19일까지 5일 이상을 버틸 수 있는 현금이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싶어 걱정이 앞섰다. 남은 일정동안 예상되는 현금지출을 아무리 절약하여 산출하여도 지금 남아있는 잔액으로는 확실히 부족하였다. 또 절약하는 방안만 찾다보면 자칫 먹을거 제대로 못먹고, 보고싶은 것 제대로 못보게 되어 본래의 여행목적과 거리가 먼 요란하게 궁상만 떨다 돌아가게 될 지도 모른다는 우려감마져 들었다. 또한 아이들에게 부모인 나의 준비소홀로 고생만 죽도록 시키는 어이없는 여행만 시킨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각인시킬지도 모르고…
결국은 궁리끝에 가이드인 장백관님에게 우선 빌리고 한국에 돌아가 갚는 방도를 내어 어렵게 장 가이드에게 사정얘기를 하니 너무도 쉽고 선선히 응해 주면서 더 필요하면 더 빌려주겠다고 한다. 뭘 믿고 저렇게 아무 거리낌없이 빌려준다는 것인가. 사실 외국에 나가면 외국인 보다 한국인을 더 경계하는 잘못된 심리가 일반적이라고 하는데 말이다. 아마도 배낭족 만큼은 양심이 재산이고 설령 떼었더라도 오죽하면 갚지 못하겠는가 하고 그냥 묻어버리는 것일까. 일반 패키지 여행사에서 주관하는 프로그램에 참가하여 오는 여행자일 경우 넉넉한 비용을 준비하여 오지만 배낭여행자들을 상대적으로 빡빡한 비용으로 여행을 시작하기 때문에 야간 열차나 유명한 관광지에서 잠깐 한눈 판 사이 돈을 잃어버리거나 짚시나 치기에게 당하는 백패커가 더러 있다고 하면서 그들이 도움을 청하는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는 얘기도 덧붙여 주었다. 후의 감사하면서 고맙게 빌린 돈을 받아 넣고 나니 남은 일정에 저으기 안심이 되었다.
4.시스티나 예배당에서
솔방울광장에서 있었던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에 대한 설명을 가지고 우리 일행은 예배당으로 향했다.작품의 보존을 위하여 예배당은 약간의 자연채광만 허용하는 건물구조를 가지며 카메라후레시를 터트리지 못하도록 아예 사진촬영을 엄격히 금지시켰고 이를 어기는 사람을 제어하기 위하여 여러명의 관리인 관광객 사이를 열심히 헤짚고 다녔다. 미켈란젤로를 르네상스시대의 대표적인 화가로 화가이면서 위대한 인물로 우뚝세워준 이들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과 경외심을 불러오기에 충분하다. 회화를 전혀 모르는 사람일지라도 이 작품의 완성과정에서 미켈란젤로의 육신이 파괴되어 가는 것도 불사하면서 저 높은 천장에 창세기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허리를 구부린채로 난간에 기대어 4년5개월동안 이 작품에 매달려 결국 그는 무릎에 물이 고이고 허리가 굽고 말았단다. 그의 육신이 파괴되는 댓가로 결국 우리는 이 명작을 얻고 말았던 것이다. 천장에 그려진 천지창조에 잇대어 중앙 벽면을 장식한 최후의 심판에는 10여년전에 한국을 휩쓸고 간 인류의 종말(휴거)를 연상하게 한다. 거의 6년간에 걸쳐 60평이 넘는 넓은 벽면에 391이나 되는 인물을 등장시켜 최후의 심판이라는 사실같은 상상도에 다양하고 각기 다른 모습으로 심판의 날을 맞이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감시의 눈을 피해 카메라를 꺼내었다. 이 위대한 명작을 내 눈에만 담아가기엔 너무 아까울 뿐더러 내 눈의 회화적인 메모리가 너무 적어 제대로 담아내지도 못할 것 같아 실례를 무릎쓰고 카메라 담고 싶었다. 물론 푸레시는 잠그고 찍는 예의는 지켜서 말이다. 어려번의 시도로 그나마 괜찮은 상태의 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5. 아이스크림 들고 베드로 성당으로
시스티나 예배당 투어를 끝마치자 바티칸 박물관 문닫을 시간이란다. 벌써 3시 가까이 되었다. 6시간을 투어 하였건만 우리는 얼마나 보고 느끼고 간 것일까… 투어참가자를 이끌고 성베드로 성당으로 향했다. 가면서 역사와 맛을 자랑하는 아이스크림 가게에 잠시 들러 가이드가 한턱 내겠다고 한다. 브라보콘 만한 것이 아니라 다먹으면 한끼 요기가 될 정도의 양이 듬뿍 담긴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들고 로마와 바티칸을 경계하는 담밑의 길을 따라 베드로 광장에 들어섰다.
로마시대에는 원래 전차경기장으로 조성되었으며 광장 한가운데엔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밸리스크가 우뚝 서 있다. 팡테온이나 나보나 광장에 서있는 오벨리스크엔 이집트의 상형문작가 새겨져 있으나 여기 것은 교황의 지시로 모두 삭제되어 버렸다. 광장을 에워싸고 있는 회랑의 4열 원주는 보는 위치에 따라 4열로 보이기도 하고 하나로 보이기도 한다. 르네상스시대를 대표하는 이탈리아 조각가 베르니니의 주도하에 재건축된 베드로 성당은 바티칸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로 초대 교황으로 일컬어지는 성피에트로를 위해 건축되었다. 성당의 머리가 되는 132m가 넘는 코폴라는 올라가기도 힘들지만 올라가서 내려다 보는 로마시내와 베드로 광장 조망은 더없는 압권이다. 베드로 성당을 들어가기전에 화장실에 볼일이 있어 들렀다. 큰거 용무가 있어 나홀로 방에 들어가 용무도 처리하고 복대와 지갑에 각각 현금과 신용카드를 다시 확인하고 방을 나와 가이드의 뒤를 따랐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 예수를 안고 시름에 잠긴 마리아의 모습을 표현한 조각품 피에타와 성 피에트로의 입상들을 두루 관람하고 아이들과 코폴라에 올라갈 입장료를 지불하려고 매표소 입구에서 지갑을 찾는 순간, 아차 싶었다. 지갑이 없다. 아무리 뒤져봐도 없다. 치기를 당하지도 않았는데 지갑이 어디갔단 말인가.. 순간 앞으로 어떻게 해야하나… 다행이 복대는 그대로 있고 어느 정도의 현금과 또 다른 신용카드가 있어 최악의 상황은 막을 수 있지만 그래도 지갑에 있던 신용카드와 현금이 아깝고 낭패였다. 여행을 오기 전에 신용카드와 현금을 복대와 지갑에 각각 분산하여 보관하기로 하고 지갑에는 당일 현금 지출이 예상되는 적은 현금과 주로 사용키로한 신용카드를 넣어두는 식으로 위험을 분산하기로 하고 오늘도 그 방법을 따랐던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어떻게 잃어버렸는지, 소매치기를 당한 것은 아닌지, 여하튼 어디인지를 우선 알아내고 찾아야 한다는 생각의 연속들이 불과 30초도 안되는 사이 머리 속에서 빛의 속도보다도 빠르게 회전하고 있었다.
아!! 맞아! 아까 성당에 들어오기 전에 볼일차 들렀던 나홀로 방(?) 휴지 걸이에 지갑을 올려 놓은 채 그냥 나온 것이라는 확신이 서자 머뭇거릴 필요도 없이 그 곳으로 내닫기 시작하였다. 아이들에게 영문을 설명할 사이도 없이 지갑이 있는 곳으로 빨리 갈 수 밖에 없었다. 매표소를 벗어나 100m가 넘는 성당내부를 마라톤 선수가 출발선을 힘차게 딛고 뛰쳐나가 대로를 가로지르듯이 달려나갔다. 제발 그 방에 내 다음으로 아무도 들어오지 않기를.. 설령 방문을 하였더라도 성당이라는 신성한 곳에 오는 사람이 설마 남의 물건에 손을 댈까 하는 자기위안을 머리 속에 기원삼아 염원하며 그 방(?) 쏜살같이 달려가 문을 열어졎혔다. 본능적으로 두 눈이 휴지걸이에 닿자 휴~ 하는 안도의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내 가오리 지갑이 누구의 손도 닿지 않은채 거기 그렇게 앉아있었고, 나는 순간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 그득히 밀려오는 것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오늘 아침 호스텔에서 가져온 실망감이 일순 이순간의 고마움과 한꺼번에 상쇄되는 듯 했다.
이미 입장시간이 마감되었다는 매표원 할아버지의 얼굴표정에 대고 나는 어떻게 좀 해달라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이자 짜증스런 듯이 티켓을 툭 던져주었다. 성당지붕까지 올라가는 엘리베이터를 오른 뒤에야 평상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내려 돔으로 이루어진 코폴라를 오르기 위하여 나선형으로 좁게 만든 300여개의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돔에서 내려다 보는 베드로 광장과 갈색톤으로 도배된 로마시내를 멀리까지 내다볼 수 있었다. 어제 투어하였던 포로로마노, 콜로세움, 엠마누엘2세 기념관, 팡테온 등을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베드로 광장과 광장 앞으로 난 도로의 형상이 열쇠를 닮았다는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서야 왜 열쇠 모양의 구도로 건축하였는지 이해가 갔다. 이 곳이 바로 베드로가 묻혀있는 곳이 아닌가.
코폴라에서 바라본 베드로(Pietre)성당 광장 모습 |
베드로의 상징인 열쇠 모양의 광장과 도로 모양이 선명 |
코폴라에서 내려와 자전거나라의 장백관 가이드 그리고 오늘 함께한 일행들과 작별의 인사를 하고 우리는 다시 성당내부를 찬찬히 살펴보았다. 지갑분실 해프닝으로 경황없이 지나쳐버려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을 보상하듯이 베드로가 묻혀있는 단과 그 주위를 장식한 화려하고 위엄서린 제단, 성당내부를 여러개로 나누어 제각각 예배를 볼 수 있도록 구획한 소예배당 그리고 피에타상을 다시 감상하였다. 성당 옥상에 건축된 돔의 원주와 똑같은 크기의 원주가 성당바닥에 대리석으로 그어져 있는 곳으로 가 아이들과 함께 쭉 동그라미를 그리며 돌아보았다. 밖으로 나오니 벌써 땅거미가 내려앉아 있었다. 광장에서 성당의 멋진 야경을 디카에 담고 서둘러 숙소로 돌아갔다. 야간 열차편으로 베네치아로 이동하자면 바삐 움직여야 할 시간이다.
6. 야간열차로 우리는 베네치아로 간다.
숙소로 돌아오니 호스텔지배인이 와 있었다. 나는 다시 난방문제를 제기하였고 아침에 말해놓은 대로 환불을 요구하였다. 지배인이 자신의 집무실로 나를 안내한 다음 그간의 내용을 직원들로 부터 이미 들어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도미토리 수준으로 숙박비를 재산정하여 환불을 해줄 수는 없고 10% 상당의 금액을 환불하여 줄것이니 받아주겠는냐면서 난방이 제대로 되지않은 이유를 설명하여주었다. 로마가스 공급회사의 잘못으로 우리가 묵고있던 숙소주변이 전부 난방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호스텔 자체적인 문제가 아니니 이해하여 달라며 제시한 조건에 난 별 이의를 달수 없어 받아들이면서 저녁을 먹어야 하니 공동취사장에서 저녁을 해먹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니 딱잘라 숙박기간이 오늘 오전으로 끝났으니 안된다고 한다. 대신에 호스텔과 제휴되어 저렴한 가격으로 저녁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을 추천하여 주었다. 하는 수 없이 추천하여 주는 식당으로 가 호스텔과 가격협의된 메뉴로 저녁을 지하철로 향했다. 베네치아로 가는 야간열차(Euro Night)는 Termini에서 지하철로 4정거장을 이동하여야 했다. 하지만 이날 밤에 또다시 우리 앞에 로마가 주는 또하나의 해프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녁 9시가 다된 시각 아침에 바티칸으로 갈때 지하철 표를 팔던 Termini역 지하 1층에 있는 상점으로 내려가니 벌써 문을 닫혀있었다. 하는 수 없이 지하2층으로 내려가 지하철 개찰구에 마련되어 있는 자동발권기에 동전을 넣고 버튼을 아무리 눌러도 지하철 티켓이 나오지 않았다. 개찰구 입구의 역무원에게 이 사실을 얘기하니 구간요금인 0.77Euro만 넣어야 발권이 되지 그이상의 금액을 넣으면 되지 않는단다. 나와 아이들3명분 2.31Euro를 넣으면 될 것 같아 동전을 뒤져보니 그 금액을 정확히 동전으로 맞춰낼 수는 없었다. 다시 역무원에게 가 동전이 없다고 하며 잔돈을 좀 바꿔달라고 해봤지만 신문 읽는 데 정신없던 그는 짜증과 귀찮다는 표정을 그대로 드러내면서 위에 매표소가 있으니 거기 가보란다. 거기도 문이 닫혔다고 하니 나한테 어쩌라는 것이냐며 신경질을 낼 태세였다. 자기는 환전도 해줄 수없고 제발 좀 사라져 버리라는 투로 아예 등을 돌려버린다. 하는 수 없이 아이들에게 ‘우리 할 수 없이 삥차를 타고 Tiburtina로 할 거같다야’하니 큰 놈이 걸리면 어떻하냐며 걱정을 한다. 우리가 일부러 표를 구하지않고 차를 탄 것이 아니고 여기서 있었던 사정을 얘기하는 수밖에 없다고 달래고 아이들과 차에 올랐다. 4 정거장을 거쳐가는 동안 아이들은 계속하여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검표원이 오면 잽싸게 나에게 알려주어 위험한 사태를 미연에 막아보겠다는 생각에 연신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녀석들을 보면서 기특하기도 하였다. 사실 길지 않은 10분간의 시간이었지만 나와 아이들에게는 꽤나 길게 느껴졌던 시간이었다. 객차가 역에 멈추자마자 뒤도 돌아보지않고 서둘러 내려 안내판이 가리키는대로 지정된 플랫폼으로 잰걸음을 옮겼다.
대략 10시가 되어가는 즈음 우리는 열차가 도착할 플랫폼에 올라섰다. 아직은 많지 않은 승객들이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부분은 차가운 기온때문에 웅크린 자세로 함께할 일행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사이에는 우리처럼 배낭여행을 하고있는 우리나라의 젊은 학생들도 보였고, 우리들 가까이에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보이는 아주머니 두분과 할머니 한분, 초등학생 정도의 아이들 서넛이 함께 모여 이야기 꽃을 피우고 있었다. 우리를 보더니 한 아주머니가 한국분이냐면서 반겨주었다. 그리고는 열차티켓을 펀칭하였느냐면서 여기는 개찰구가 따로 없는 대신에 스스로 플랫폼으로 올라오는 입구에 노란색 박스가 벽에 걸려 있으니 거기가서 펀칭을 하여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그제서야 유럽에서 열차 타는 법을 인터넷에서 열심히 익혔는데 지하철티켓에 장황하여 깜빡하였던 것이다.
늦은밤 열차를 기다리며 플랫폼에서 한동안 떨고 있는데 저 앞에서 기다리던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티켓에 정해진 객차번호를 확인하고 올라서 우리 이름이 걸려있는 쿠셋으로 찾아갔다. 대충 짐을 올려놓은 뒤 침대를 내려놓고 시트를 깐 다음 각 침대별로 아이들을 배정하고 잠시 쉬고 있으니 열차가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로마에서의 삼일째 되는 밤이 이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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