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왕실 가족을 위해 지어진 궁궐
창덕궁과 이웃하고 있는 창경궁은 원래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을 위해 세종대왕이 지은 수강궁을 성종조에 이르러 늘어난 왕실 가족들을 위해 1484년 새롭게 지은 궁궐입니다. 성종 재위시에 선대 왕비가 세분이나 있어(세조의 정희왕후, 성종의 아버지 의경세자의 소혜왕후, 예종의 안순왕후) 이분들이 생활할 수 있는 거처가 필요하였지요. 따라서 정치적인 기능보다는 왕실의 생활영역에 가까운 궁궐이었지요.
경복궁과 창덕궁이 정전을 남향으로 하여 남북 중심축을 따라 건물을 엄격하게 배치한데 반해, 창경궁의 중심 부분은 특이하게 동향으로 배치되어 있습니다. 고려 때 동향이었던 것을 존중했다고도 하는데, 입지 여건상 동향으로 짓는 것이 지형에 더욱 자연스럽고 적합했기 때문인 듯합니다. 이처럼 창경궁은 자연 지형을 고려하면서도 기능과 용도에 따라 생활의 편의를 추구하여 조성했기 때문에 아름다움과 친근함을 두루 갖춘 궁궐이 되었지요.
2. 이제는 창경원이라고 하지말아야지..
임진왜란으로 도성의 궁궐이 모두 소실될 때 창경궁도 이를 피해갈 수 없었지요. 창덕궁이 재건되면서 함께 창경궁도 재건되어 이 때 홍화문, 명정전, 명정문이 중건되게 됩니다. 그러면서 창덕궁의 이궁으로 역할을 맡게 되지요. 재건되고난 뒤에도 여늬 궁궐과 마찬가지로 여러차례 화재로 일부 전각들이 소실되는 피해를 입기도 하였지요.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들어서 문화유산으로 남아있어야 할 전각들이 저들의 손에 의해 철저히 파괴됩니다. 창경궁을 순종을 위로한다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창경원이라는 공원으로 격하시키고 전각을 허문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들어서게 합니다. 전각이 허물어진 경내에 벗꽃으로 식재하고 일본식 건물을 지어 박물관으로 사용하는 만행을 저지르지요. 참혹한 전쟁 속에 파괴된 것이 아니고 야만인의 손에 파괴되었지요. 맥아더는 태평양전쟁에서 일본을 굴복시키기 위해 본토 공습을 감행할 때도 쿄토는 유적이 많으니 빼라고 하였다는데...
해방이 되어서도 창경궁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학생들의 봄소풍 단골장소가 되었지요. 봄에는 벛꽃놀이 명소였다지요. 창경원이라는 이름하에 공원으로 1980년대까지 이어오다가, 1983년 이후 동물원과 놀이시설을 철거하고 일부 전각을 복원하여 창경궁으로 다시 우리에게 다가왔지요.
3. 국보 249호 동궐도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체 모습을 그린 가로 576cm, 세로273cm의 큰 그림. 1826년에서 1830년 사이에 도화서 화원들이 그린 것으로 추정한답니다. 건물뿐 아니라 다리와 담장, 괴석까지 실제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건물의 이름을 기재하여 궁궐 연구와 복원작업에 결정적인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열여섯 폭의 비단에 아름답게 채색한 이 그림은 동양화와 서양화 기법을 모두 수용하고 있으며, 동궐이 가장 전성했던 시절을 기록하여 예전의 화려했던 시절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창경궁을 들어서면서 좌측의 행각에 가면 볼 수 있습니다. 창경궁을 관람하기 전에 반드시 보고 가야 할 귀중한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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