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헌종의 검소한 면모가 느껴지는 곳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은 김재청의 딸을 경빈(慶嬪)으로 맞이하여 1847년(헌종13)에 낙선재를, 이듬해에 석복헌(錫福軒) 등을 지어 수강재(壽康齋)와 나란히 두었습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23대 순조의 왕비)를 위한 집이었습니다. 헌종은 평소 검소하면서도 선진 문물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건물의 모양새는 경복궁 건천궁처럼 아주 소박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단청을 하지 않았고, 일반 양반가의 한옥 모습을 하고 있지요. 특히 왼편에 서있는 누마루는 다락방 형태의 마루로 아궁이를 갖추고 있으며 아궁이 벽면과 기둥 받침에 멋스러움을 더해놓았습니다.
해방이 되어 조선왕실의 재산이 국가에 귀속되었지만, 순종의 비인 순정효황후의 노력으로 남게 되었지요. 일제에 의해 반강제로 이끌려간 영친왕과 덕혜옹주가 돌아오면 머물 곳이 있어야만 한다고 믿었나봅니다. 이 분들이 다시 조국으로 돌아오자, 석복헌에서는 순종의 비 순정효황후가 1966년까지 기거하였고, 수강재에서 덕혜옹주가, 낙선재에서 영왕의 비 이방자 여사가 1989년까지 생활하였습니다.
2. 왕비의 대우를 받았던 후궁, 경빈 김씨의 처소 석복헌
헌종은 첫 번째 왕비 효현왕후가 16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자 이듬해 다시 왕비를 간택했는데, 대왕대비에게 간청을 하여 전례 없이 본인이 직접 간택에 참여하게 되었지요.
조선조에는 왕비 간택절차를 가례도감이라는 임시 관청을 설치하여 간택과 혼례를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왕비의 조건으로는 우선 집안의 가계를 첫째로 보고 그 후 아녀자가 갖추어야 할 부덕을 심사했으며 마지막으로 미모를 보고 간택하였습니다. 이렇게 세가지를 갖춘 처녀를 우선 초간택으로 여러 규수들을 뽑은 후 재 심사하여 줄이고 줄여서 마지막으로 세 명을 골라 뽑았습니다. 간택은 이렇게 초간택. 재간택, 삼간택 으로 이루어졌으며. 세 명 중 한명이 왕비나 세자빈으로 결정되면 나머지 둘은 결혼하지 못하고 평생을 혼자서 살거나 왕의 후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헌종은 삼간택에 남은 세 사람 중 경빈 김씨를 마음에 두었으나, 결정권은 대왕대비에게 있었으므로 효정왕후 홍씨가 계비로 간택됩니다. 이로부터 3년 뒤 왕비가 있는데도 후사를 생산 가능성이 없다는 핑계를 대어 후궁을 맞이합니다. 이 분이 바로 헌종이 삼간택에서 마음에 두었던 경빈 김씨입니다. 사대부 집안 출신으로 후궁이 된 경빈은 헌종의 지극한 사랑으로 왕비와 다름없는 대접을 받았습니다. 석복헌은 바로 경빈 김씨가 머물었던 처소였습니다.
이처럼 헌종의 애틋한 사랑을 받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습니다. 헌종이 경빈을 후궁으로 맞이한지 겨우 2년만 에 승하하고 말지요.
3. 기품 있는 아름다움, 낙선재 후원
존경하는 할머니 대왕대비와 사랑하는 경빈을 위해 지은 집답게 세 채의 집 뒤에는 각각 후원이 딸려 있습니다. 낙선재 뒤에는 육각형 정자인 평원루(平遠樓, 현재는 상량정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음)가, 석복헌 뒤에는 한정당(閒靜堂)이, 수강재 뒤에는 취운정(翠雲亭)이 남아 있습니다. 특히 낙선재 후원은 서쪽 승화루 정원과 연결되는데, 그 사이 담장에 특이하게도 원형의 만월문(滿月門)을 만들었습니다. 건물과 후원 사이에는 작은 석축들을 계단식으로 쌓아 화초를 심었고, 그 사이사이에 세련된 굴뚝과 괴석들을 배열하였지요. 궁궐의 품격과 여인의 공간 특유의 아기자기함이 어우러진 대표적인 정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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