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파리의 새벽공기는 왜이리 차가운가?
어제 저녁 스위스 인터라켄에서 열차를 타고 바젤에 도착하니 밤 11시가까이 되었다. 바젤은 스위스 북부의 국경도시로서 독일과 프랑스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우리가 내린 스위스 바젤역에서는 파리로 가는 야간열차를 탈 수 없고 프랑스령에 속해있는 바젤 역으로 걸어서 이동하여야 한다. 이미 밤이 한참 늦어버린 시각이라 주위를 분간할 수 없고 오가는 인적마져 드물어버려 어떻게 찾아가야할 지 순간 당황스러웠다. 여행 책자에는 걸어서 15분 거리라고만 되어 있어 대충 버스로 5분 정도려니 간주하고 열차에서 함께 내린 사람들이 타는 버스를 좆아 무작정 타려고 승강장으로 갔다. 사실 걸어가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만 밤공기가 여간 차지 않고 아이들도 많이 지쳐보여서 버스로 이동하려는 것인데 도무지 어느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좀 더 확인을 한 뒤에 결정키로 하고 주변을 좀 더 세심하게 살펴보았다. 우리가 나온 역에서부터 주변을 무비카메라 촬영하듯이 천천히 훑어가는데 눈길을 잡고 놓지않는 곳이 보였다. 대충 짐작으로 저곳으로 가면 되겠다 싶어 아이들과 그쪽으로 갔다. 몇몇 사람들이 그쪽으로 가고 있었는데 그들 중에서 검은 색의 옛날 양복차림에 제법 길게 기른 머리에 옆머리를 비비 꼬아 내리고 까만 원통모자를 쓰고 있는 프랑스 신부 복장의 세사람이 천천히 그쪽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들이 나에게는 힌트였던 셈이다.
역구내에 들어서니 몇몇 사람들이 의자에서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었다. 난방은 이미 꺼져있어 두둠한 복장차림들이었다. 우리도 한곳에 자리를 잡고 침낭을 펼쳐 아이들이 앉아있는 위에 덮어주었다. 대략 이렇게 하여 1시간 반 정도를 여기서 기다려야 한다. 밖에 나가보아도 별다른 것이 없고 매점도 모두 철시한 상태라 단지 의자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도리밖에 달리 할 것이 없었다. 사람들 중에는 우리처럼 배낭여행중인 사람들도 여러명 눈에 띄었으나 모두 춥고 지쳐보여선지 서로 얘기를 나누는것 조차 힘든 것 같았다. 춥고 따분하고 지루하게 기다리다 보니 플랫폼으로 나가는 문이 열렸다. 티켓에 명시된 침대칸으로 올라가 예약표가 꽂혀있는 객실 문을 열었다. 흑인 여성 한사람이 이미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각자의 침대를 정리해주고 자리에 들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잠에 골아떨어지고 말았다.
침대차는 역무원이 도착지에 도착하기 30분 전에 승객이 자고있는 침대칸으로 와 내릴 준비를 하라고 알려주면서 여권, 유레일패스를 넘겨주게 되어 있다. 하지만 잠자리가 낯섫어선지 승무원이 오기 전에 눈이 뜨였다. 커튼을 걷어 밖을 내다보니 아직은 캄캄한 밤인데 가로등들이 분주히 지나가고 있었다. 캄캄한 어둠인데도 많은 가로등이 밖을 밝히고 있으니 파리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리라. 작년 1월에 회사업무차 파리를 잠깐 들러본 적이 있어선지 이 도시가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겨우 하루하고 반나절을 보냈는데도 생경스럽게 느껴지지않는 것은 왜일까. 파리 동역(Paris Est) 플랫폼에 내려섰다. 아침 7시가 가까워진 시각인지라 볼을 때리는 겨울바람이 제법 매서웠다. 캐리어를 끌고가는 손이 무척 시렵게 느껴졌다. 작년에 와본 경험을 바탕으로 우선 지하철 노선도를 매표창구에서 얻어 예약한 숙소 인근 지하철 역을 찾았다. 그리고 10매짜리 까르네를 1셋트사서 지하철에 올랐다.
우리나라의 지하철은 관광객이나 지하철을 많이 이용하는 승객을 위한 다양한 요금체계를 마련치 않고 있다. 무조건 타면 구간별로 정해진 요금을 내야만 하고, 정액권과 요금 후불 카드만 마련되어 있다. 서울이나 부산의 경우 제법 외국인 관광객이 많이 오는 곳이지만 그들을 위한 관광패키지가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어 파리의 경우 10매를 묶음으로 대략 30% 저렴하게 판매하는 카르네와 지하철과 버스를 연계한 1일권, 3일권, 5일권 패스가 있고, 또 여기에다 박물관이나 미술관 관람권까지 묶어 파는 패스까지 있다. 따라서 여행객이 자기의 여행스케쥴과 기호에 맞춰서 다양하게 선택할 수 있도록 마련되어 있다. 외국인에게는 아직 우리나라의 교통비가 무척이나 저렴하다고 인식되어 있어 다양한 요금체계를 만들 필요성을 지하철의 상품개발부서에서는 못느끼고 있어선가?
예약해 놓은 숙소(호스텔)에서 가까이 있는 지하철역은 바스티유 극장이 있는 곳이다. 한때 정명훈씨가 지휘봉을 잡았던 바스띠유 오케스트라가 상설 연주활동을 하는 극장 바로 그곳이다. 프랑스 혁명시대에 이 오페라하우스는 바스띠유 감옥으로 악명을 높이던 곳으로 유명하였지만 지금은 유명한 음악 공연장으로 탈바뀜하여 많은 음악 애호가들의 발길을 잡아끄는 곳이다. 바스띠유 극장을 끼고 숙소까지 걸어가는데 매섭게 부는 바람과 뚝 떨어진 기온이 장난이 아니다. 작년에 왔을 때는 비까지 부슬거렸어도 이렇게 춥지는 않았는데 올해는 분명 이상기온인가보다.
2. 루브르 박물관에서 다시 만난 자전거나라
한국에서 예약하면서 받아놓은 약도에 의지하다보니 비교적 쉽게 숙소인 AIJ Hostel를 찾아낼 수 있었다. 현찰이 아닌 신용카드로 2일분 숙박비를 결제하고 방 배정을 기다렸다. 데스크의 담당자가 작은 소리로 뭐라고 하는데 혼잣말인줄 알고 지나쳤는 나에게 안내하는 소리였다. 방은 저녁에 배정하니 짐은 지하에 마련된 로커에 두고 시내 투어를 하란다. 짐을 맡기고 호스텔에서 제공하는 빵과 우유를 받아 아침으로 때웠다. 아침시간이라 투숙객들로 붐볐는데 로마에서 보다는 한결 차분하고 정돈된 느낌이 온다. 데스크의 담당자들 차림도 말쑥하고 호스텔 내부도 작고 오밀조밀해 보였지만 정갈한 이미지를 풍겼다. 내심 로마에서처럼 황당한 경우를 또 당하지는 않을까 우려하였지만 그런 걱정은 버려도 될 성싶다.
지하철로 루브르박물관에 도착하니 자전거나라 가이드와 만나기로 한 9시가 거의 다 된 시각이었다. 유리피라미드 아래에서 아이들과 두리번 거리는데 이심전심으로 가이드를 만날 수 있었다. 로마에서 받았던 인상을 여기 파리에서까지 지속시킬 수 있어서 여행의 효과를 배가시키는 것같았다. 사실 자전거나라가 주관하는 루브르투어는 정식버전이 아니고 소위 Pilot버전이라 할 수 있다. 정식으로 실전투어를 하기 전에 연습한다고나 할까? 프랑스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가이드 허가를 받기위하여 협의중이어서 이 기간동안 가이드들이 그동안 갈고 닦은 실력을 고객에게 검증받는 기간으로 설정하여 우리들에게 저렴한 봉사료만 받고 투어를 이끄는 형식을 취한 것이다. 따라서 투어 인원도 달랑 우리 가족 셋밖에 받지를 않았다. 아주 단촐하고 알차게 투어할 수 있는 기회를 주은 셈이다.
학생증을 소지한 아이들은 입장료가 무료이고 나만 입장권을 끊고 들어갔다. 유럽의 미술관과 박물관들은 대부분 학생들에게 엄청난(?) 혜택을 주고있다. 미술이나 역사와 같은 과목은 미술관에 들어가 해당작품 앞으로 교실을 옮겨놓고 그곳에서 감상도 하고 토론도 하고 발표도 한다. 살아있는 교육 현장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르노아르의 화풍이 어떻고, 그리스 로마의 신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우리에게 나타나고, 밀레의 만종은 작가의 어떤 심경을 표출하고 있는지를 보고 만지고 함께 느낄 수 있는 수업은 그 어떤 평론도 감상법도 이를 능가할 수 있을까? 프랑스 혁명을 배워야 할 때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인상 앞에서 그 당시의 상황을 현장감있게 눈으로 보면서 배우는 그들에게 책상머리에서 프랑스 혁명이 유럽 역사에 미치는 파장을 아무리 설명해도 이는 암기해야 하는 가짓수만 늘리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는가? 지금 나와 함께 투어하고 있는 아이들은 중학교2학년과 초등학교 6학년 졸업을 앞두고 있다. 우리 아이들이 학교를 다니면서 이따금씩 현장학습이라고 하면서 야외로 나가 배우는 것이 있다고 하여 저녁에 돌아온 녀석들에게 물어보면 그림그리기나 견학이 대부분인데 그것도 형식에 그치고 만 것 투성이다. 아이들을 인솔하고 가는 선생님들은 도착한 현장에 아이들을 거의 풀어놓고 대충 그림을 그리라거나 한번 삥 둘러보라는 지시만 하고나면 그 다음부터는 학생따로 선생따로인 시간이다.
하긴 녀석들의 얘기를 들어볼 것까지도 없다. 우리 사무실에서 올림픽 공원이 집앞 정원 내려다 보듯 보인다. 가끔 창밖으로 공원을 내려다 보면 한학교의 한학년이 전부 공원으로 현장 학습 나온 것 같이 평화의 문 주변이 학생들로 빽빽하다. 그리고 그 어디에도 학생들이 수업을 하고 있다는 물증을 뽑아내기가 어렵다. 인공으로 만든 연못에까지 들어가 장난치고있는 아이들, 나무밑에서 모여앉아 얘기하는 아이들, 가지고 온 공으로 축구하는 아이들…. 공연이 끝난 야외공연장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휴지와 빈 봉지들처럼 아이들은 그냥 그렇게 공원에 널려있을 따름이다. 아이들이나 선생들 모두 오늘은 수업을 빙자하여 하루를 그냥 노는 시간으로 때울 심산인 모습 그 이상을 얻어내기 힘든 광경이 여러번 목격되곤 하였다.
3. 루브르박물관에서 직접 목격한 모나리자
루브르박물관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국립미술관이다. 예술의 도시라 일컬어지는 파리를 연상할 때 에펠탑과 함께 떠오는 대표적인 곳으로서 프랑스의 역사속에서 왕정과 공화정의 변화무쌍한 질곡 속에서도 꿋꿋이 지속된 프랑스의 미술정책이 오늘의 루브르를 이루어내었다고 한다. 물론 그 정책의 바탕에는 프랑스 일반 국민들의 미술에 대한 애정이 크게 작용해 왔음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란다.
원래 루브르 궁은 중세 이후 많은 프랑스 국왕이 기거하였던 곳으로서 프랑스혁명이나 파리코뮌 등의 무대가 되기도 했던 곳이다. 현재는 건물의 대부분이 루브르 박물관으로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으나 그 역사는 1200년에 국왕 필립 오귀스트가 이속에 성채를 축조한 데서 비롯된다. 왕은 여기에 각종 재화와 무기·고문서 등을 수장하였는데, 특히 프랑스와 1세, 루이 13세, 루이 14세가 수집해 놓은 방대한 양의 미술품은 그 중에서도 백미라 할 수 있겠다. 프랑스 혁명 4년 뒤인 1793년 국민의회가 그 수장품들을 공개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루브르는 정식 미술관으로 발족하게 되었고, 그 후에도 꾸준히 미술품 수집이 계속 되어 오늘날과 같은 세계적인 미술관이 이루어졌다.
이와 같은 역사적 변천과정과 더불어 루브르의 소장품도 들고 나는 변동이 있긴 했으나, 등록이 완료된 것만 해도 총 20만점이 넘는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엄청난 수집량은 본질적으로 프랑스 절대왕정과 떨레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가 맺고 있다. 당시 프랑스의 지배계급은 고도로 발달된 전제왕정에 힘입어 자국내의 문화 전반을 손쉽게 독점할 수 있었다. 따라서 문화재 및 예술품의 보존능력이 엄청나게 확대되어 유럽 각국은 물론 북아프리카 지방의 예술품까지도 다량으로 획득, 잠재적 문화역량을 풍부하게 한 것이다.
이 잠재역량은 왕정이 붕괴되면서 공화정 및 제정의 여러 격변기를 거쳐 시민생활의 일상적 문화현상으로 구체성을 띠게 되었다. 결국 그 만개한 예술적 향취를 탐한 유럽제국의 예술가들이 파리를 제 2의 고향으로 삼아 그들의 창작활동을 꽃피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근대 서구미술의 상징이요, 고대부터 19세기까지의 유럽과 오리엔트의 선구적 작품들의 총집합인 것이다.
박물관으로 우리를 이끌고 들어간 가이드는 먼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흔적을 모아놓은 곳으로 인도하였다. 인류 최초의 성문법전인 함무라비법전을 시작으로 그 당시의 각종 조각을 통해서 시대상을 유추해보지만 실감나지는 않았다. 메소포타미아 유적을 뒤로하고 이제는 그리스의 조각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승리의 신 니케(Nike)상 앞에서 그리스 시대의 조각을 토한 사실적 표현의 자세한 설명이 긴 시간동안 이어졌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안고 앞으로 달려나가려는 동작을 조각한 이 작품은 특히 가슴 아래와 허벅지에 드러나는 얇은 면 실크가 바람에 날리는 모습이 너무나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흡사 살아있는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이 정말 바람에 흩날리는 것처럼 보인다. 그 다음에 우리를 맞이한 것은 밀로 섬에서 발굴된 비너스 상이다. 미의 여신 Venus를 조각한 이 작품은 여성 몸의 황금구조를 표현하였다고도 한다. 아무리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는 구도에 잘려나간 팔은 무엇을 들고 있었는지를 우리에게 물어보고 있듯이 서있다.
이들 조각들을 뒤로하고 회회관으로 이동하였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미술책과 세계사 교재 속에 나오는 바로 작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다비드와 드라그르와가 남긴 작품이 교과서를 통해 익혀왔기에 회화관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눈이 그쪽으로 자연스레 가게 되었다.
다비드(David)는 신고전주의에 속하는 나폴레옹시대의 왕당파 화가이다. 나폴레옹시절을 겪으면서 프랑스 혁명 속에서 사실적인 모습을 화폭에 담아낸 작가로서 나폴레옹 관련 작품들과 역사적인 사실을 소재로 하는 작품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대표작으로 ‘나폴레옹 대관식’과 ‘사비니 여인의 중재’를 여기 루브르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특히 나폴레옹대관식 작품은 크기와 세밀한 묘사가 나폴레옹이 황제 즉위식을 기록사진으로 남겨놓은 것 같은 사실적 표현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대관식 작품을 지나서 감상할 작품이 드라크르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인’이다. 프랑스 혁명 당시의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고 혁명의 모습을 작가의 상상력으로 동원하여 그렸다고 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의 모습은 유럽의 여러 도시의 광장에 서 있는 동상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는 가이드 설명이다. 초등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그림 앞에서 철퍼덕 앉아 선생님과 수업을 하고 있다. 선생님 설명에 귀를 기울여 듣고 있는 아이들, 옆에 친구와 장난치는 아이들, 관광객에 한 눈을 팔고 있는 아이들.. 드라크르와 앞에서 아이들은 야외수업에서 느낄 수 있는 자유를 천진스런 모습으로 즐기고 있다.
가이드는 우리가 학창시절에 접하지 못해 낯선 작품들을 지나쳐 이내 사람이 운집해 있는 작품 앞으로 안내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남긴 불후의 명작 ‘모나리자’다. 솔직히 미술에 관한한 감상할 수 아는 눈을 전혀 갖지 못한 내게 불후의 명작(?)은 화려한 수식어 이상의 의미도 없다. 하지만 루브르 박물관에 와서 모나리자를 보지 않고 간다면, 시험지에 이름을 쓰지 않고 나온 나온 것처럼 안타까운 후회나 마찬가지다. 앞서 보고온 나폴레옹 대관식에 비하면 10분 1 정도의 크기의 작품이 벽 가운데 덩그러니 걸려 있었다. 그 앞에서 가까이 접근을 박는 경계줄 뒤에 많은 사람들이 겹겹이 서서 모나리자를 알현(?)하고 있다.
루부르 박물관에 있는 모나리자의 실제 크기는77cm x 55cm 생각보다 큰 그림이 아니었다. 원래는 그림의 양쪽에 기둥을 설치해서 걸어 놓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는데 17세기 초 액자로 만들기 위해서 당시 무지한 표구업자가 가로, 세로를 어느 정도 잘라 내버린 것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고 있다. 모나리자(Mona Lisa)는 영어 이름이다. 프랑스어로는 ‘라 조콩드’ 이태리어로는 ‘ 라 조콘다’이다. 모나리자의 모나는 마돈나(Madonna)의 준말 몬나(Monna)인데 이태리어로 부인이라는 뜻이다. 모나리자의 작품 이름이 입에 오르내리게 된 이유는 모나라자의 모델이 누구인지 아직 정확히 모르기 때문이다. 현재까지 유력한 모델의 이름은 피렌체의 비단 상인이었던 '프란체스코 디 바르톨로메 디 자노비 델 조콘다'의 부인 '리자 게라르다니'이다.
모나리자를 마지막으로 루브르박물관 투어를 마무리하였다. 루브르박물관을 제대로(?) 감상하면서 투어 하려면 최소 3~4일 정도 시간은 투자하여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내가 가진 알량한 미술지식으로는 반나절도 충분했다. 아이들도 배고파하는 거 같아 가까운 식당을 찾았다.
4. 오후 일정은 콩코드광장에서 센느강 유람선까지
오후 일정은 콩코드광장 -> 샹제리제거리 -> 개선문 -> 바토무슈 유람선 -> 에펠탑 야경 투어 순으로 수정하고 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루브르박물관에서 개선문 방향으로 얼마 걷지 않으면 넓은 광장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오벨리스크가 서있는 광장이 나타난다. 콩코드 광장이다.
콩코드 광장은 프랑스 혁명의 상징이다. 프랑스 혁명 중에 루이 16세가 이곳에서 처형되었고, 10월 16일 왕비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참수된 형장이기도 했다. 1795년 현재 “콩코드 광장”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시작했고, 공식 이름이 된 것은 1830년이다. 콩코드(Concorde)는 화합, 일치라는 뜻으로, 이 광장의 이름은 이러한 어두운 역사를 넘어 평화화 화합으로 나가자는 프랑스의 염원이 담겨 있는 것이라고 한다.
광장의 중심에는 이집트 룩소르 신전에서 가져온 룩소르(Luxor) 오벨리스크(클레오파트라의 바늘)가 놓여 있다. 기원전 126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원래 이집트 테베(Thebes, 현재의 룩소르)의 람세스 신전에 있던 것으로 1829년 이집트의 총독이자 군사령관이던 알바니아 출신의 무함마드 알리가 프랑스에 선물하였다. 오벨리스크에는 프랑스로의 운송 과정이 묘사되어 있으며, 4년의 운송 기간이 걸렸다. 최상단 부분에 소형 피라미드 모습의 금박이 있었으나 아시리아인의 침입과 페르시아인의 점령 과정에서 분실되었는데[1], 프랑스 정부에서 복원 작업을 벌여 1998년 5월 14일 복원이 완료되었다. 복원 자금에는 약 1백 50만 프랑이 소요되었으며, 수명은 약 40년이다. 복원으로 인해 오벨리스크의 높이는 이전보타 2m 가량 높아지게 되었다.
눈이 시도록 푸른 하늘이 몸을 휘감는 찬공기가 더욱 더 차고 푸르게 보인다. 콩코드광장에서 낙엽마저 말라버린 샹제리제 거리를 아이들과 걸어갔다. 샹제리제 끄트머리에 버티고 서있는 개선문을 향해 걸어가며 여행 책에서 얻은 정보를 살폈다. 대통령궁이 샹제리제에 인접한 공원 안에 숨어있다고 해서 연신 두리번거렸으나 끝내 어느 건물인지 확인하지 못하였다. 길에 인접한 카페에는 차가운 날씨가 손님들을 밖에 뇌두질 않았나보다. 모두 안에 들어가 있는지 거의 눈에 띄지않는다. 허기사 아이들과 함께 카페에서 커피 한잔을 놓고 파리의 오후를 보낼 여유가 없다. 하나라도 더 보고, 보여주어야 하는 여행의 강요가 버겁다.
개선문에 도착하니 짧은 겨울 해가 개선문에 누런 불그레한 색상을 입혀주고 있었다. 세느강 유람선을 타야할 시간이 촉박하다. 지하철을 타고 개선문 아래 바토무슈 유람선 선착장 가까운 역에 내렸다. 유레일패스 소지자에게 무료 탑승인 바토무슈에 올라 이층에 자리잡았다. 안내방송되는 언어가 불어인지 영어인지 관심을 끄고, 세느강변에 보이는 에펠탑, 오르세미술관, 시테섬을 한바퀴 돌아 다시 선착장으로 돌아왔다.
에펠탑 야경을 렌즈에 담는데 최적의 장소인 사이요궁에 아이들과 사진을 몇 장 담고 피곤을 달래기 위하여 숙소로 돌아왔다. 로마의 숙소에 비하면 호텔 수준이다. 정갈한 방과 훈훈한 난방으로 어제 저녁부터 계속된 행군에서 오는 피로를 싹 풀고 내일 일정을 넉넉하게 받아볼 수 있을거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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