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시간이 많아지니 그동안 미루어 두었던 숙제들을 하나하나 해치우고픈 욕구가 솟는다. 서울로 직장을 옮긴 다음부터 주말마다 아내와 산을 찾는게 꽤나 즐거운 낙이었다. 우리나라에 솟아있는 이름깨나 가지고 있는 명산 중에서 절반은 다녀 본거 같다. 아내가 토요일도 일을 해야해서 비용이 곱절이나 들어 연휴에나 가볼 수 있는 한라산은 아직 올라보질 못하였다.
산행보다는 골프와 자전거에 빠지면서 어느덧 지리산을 찾은 지가 10년은 족히 지난 거같다. 갑자기 주중에도 나만의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게 되니 제일 먼저 자전거 4대강 종주를 마무리 하고 싶었으나 작년에 손을 본 몸이 완전치 못해, 지리산 화대종주로 관심이 쏠렸다. 10년 전, 힘들지 않겠냐는 아내를 설득해 완주한 지리산 종주 사진을 꺼내 보았다. 날씨가 11월에 접어들어 낮의 길이는 짧고, 밤에는 제법 한기를 느낄 때였으나, 이때가 천왕봉애서 일출을 볼 수 있는 확율이 가장 높다.
2005년 11월 12일(토요일) : 성삼재 - 벽소령
대부분의 주말 지리산 종주팀들처럼 금요일 열시반 용산에서 무궁화 열차에 올라 새벽 두시 반에 구례구역에 내렸다. 기다리는 버스를 타고 구례버스터미널를 거쳐 성삼재에 내렸다. 여름이었으면 사방에 어둠이 걷혀있을 시간인데 깜깜한 어둠이 짙게 지리산을 덮고 있다. 렌턴을 이마에 걸고 종주의 첫발을 내디뎠다. 한시간 정도 가파르지 않은 등로를 오르니 노고단 산장이 나왔다. 잠시 쉬고 나서 다시 출발하자고 아내를 재촉하니 어제 밤 열차에서 잠도 못자고, 힘들다면 내려간다고 한다. 한참을 설득해 다시 산행을 시작했다. 출발선에 천왕봉까지 25.5km를 알리는 이정표가 서있다.
노고단 정상 갈림길에 오르니 동쪽 하늘은 여명이 밝아오고, 튼실한 아줌마 엉덩이를 닮았다는 반야봉 산그리메가 짙다. 그 오른쪽으로 이번 종주의 마지막 목적지 천왕봉도 희미하게 보인다. 허리 춤 크기의 산죽을 옆으로한 평편한 산길이 피아골 삼거리까지 이어졌다. 가는 중에 작은 관목들이 서있는 봉우리 옆으로 해가 떠오른다.
왼쪽에 반야봉, 오른쪽으로 멀리 천왕봉 |
임걸령 가는 길에 만난 지리산 일출 |
피아골 삼거리를 지나니 해가 사방을 비추고 낮이 밝았다. 물이 풍족한 지리산에서 첫번째 만나는 임걸령 샘터에서 잠시 휴식을 가졌다. 처음엔 힘들어 하던 아내도 이제는 페이스를 찾았는지 지친 기색도 없이 때로 앞서 가기까지 한다.
노루목 삼거리에서 화개재로 갈 건지 반야봉을 들러 갈건지를 물러보니 아내는 두말없이 반야봉을 들러가잖다. 노루목 삼거리 적당한 지점에 배낭을 은익시키고 가벼운 차림으로 반야봉에 올랐다. 노고단 산장을 출발한 지 4시간만이다. 삼거리에서 1km라지만 제법 가파름이 있어 시간이 꽤 걸린다. 반야봉 정상에서 아내와 하이파이브를 나누고, 심호흡을 깊에 들이마셨다. 지리산의 기운을 흠퍽 폐부 속에다 가둘 요량으로..
반야봉 정상 |
반야봉 정상에서의 지친 모습 |
노루목에서 배낭을 찾아 삼도봉으로 내려갔다. 전라북도, 전라남도, 경상남도의 경계가 모여있어 삼도봉이라고 한다. 삼도봉에서 화개재로 내려서면 아주 긴~ 나무 계단을 내딛여야 하는데 정말 가도가도 끝이 없어보였다.... 화개재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토끼봉을 오르는 데 점점 더 체력이 떨어져가는 거 같았다. 토끼봉을 건너 명선봉을 지나면 바로 나올거 같던 연하천 산장이 좀처럼 모습을 내어주지 않는다. 지쳐가고 있다는 증거다...
삼도봉 정상 도착 (10:15) |
화개재에서 토끼봉으로 오르기가 여간.... |
연하천 산장에 도착하니(14:27) 제법 많은 산꾼들이 점심을 먹고 있다. 우리도 한구석에 자리를 깔고 점심을 지어 먹고 잠시 휴식을 가졌다. 오늘 머물 숙소는 벽소령이니 여기서 두어시간만 더 가면 되기에 여유를 갖고 쉬었다. 처마에 걸려있는 풍경에 매달린 표주박이 꽤 인상적이다. 연하천 산장은 지리산에서 개인 산장으로 운영되는 두 곳 중 하나다. 국립공원 관리공단이 운영하는 산장에 비해서 규모가 작다. 대부분의 종주꾼들이 성삼재-중산리 코스를 잡다보니 여기서 묶어가는 산객이 별로 없고 화대종주(화엄사-대원사) 를 꿈꾸는 산꾼들이 종종 이용한다.
한참을 쉬고나서 벽소령을 향했다. 삼각고지 정상에 올라서니 주능선 한 켠에 빼꼼이 돌아앉아 있는 벽소령 산장이 눈에 잡힌다. 연하천에서 벽소령을 가다보면 지루하게 주변 경치를 볼 거 없이 무작정 걸어가야만 하는 구간이다. 형제봉까지.
두 개의 바위 사이로 난 좁은 통로를 지나가야 하는데 눈을 들어 바위를 올려다 보면 형님 바위 위에 소나무 두 그루가 버젓이 서있다. 형제봉이다. 형제봉에 올라서면 지나온 길과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앞 뒤로 길게 늘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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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산행 끝에 오늘 머물 숙소인 벽소령산장(대피소)에 도착했다(17:05). 성삼재에서 출발한지 12시간 만에 도착한 것이다. 연하천에서 늦은 점심은 먹은 탓에 라면을 끓여 점심에 남은 밥을 말아 먹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산 속의 초겨울은 체감 온도가 제법 차다. 잠자리에서 벗어나 잠시 카메라를 가지고 지리십경의 하나인 벽소명월을 기록에 남겼다.
피곤에 찌든 벽소령에 도착 기념촬영 |
지리 십경 중 제 4경 벽소명월 |
2005년 11월 13일(일요일) : 벽소령 - 천왕봉 - 중산리
고질적인 코골이가 다른 산객의 잠을 깨울까 싶어 제대로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이른 새벽에 일어났다. 아내와 짐을 추스려 둘째날 산행을 시작했다. 덕평봉을 지날 무렵 동쪽 하늘이 다시 붉게 물들고 있다.
벽소령을 출발하면서 (05:50) |
천왕봉 방향에 해가 떠올라 환하다. |
선비샘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세석산장으로 향했다. 어제 저녁 벽소령이 아니 세석에 숙솔 잡았다면 이 길이 참으로 멀고 먼 다리가 될 뻔했다. 어제 저녁 잠을 설친 탓인지 아내가 아침부터 힘들어 한다. 칠선봉 아래에서 한동안 휴식을 갖고 다시 출발했다. 세석에 도착해 늦은 아침을 먹고 휴식을 가졌다. 이제 천왕봉까지 넉넉잡고 세시간 반이면 오를 수 있으니 오후 한 시 정도면 지리산 정상을 찍고 하산길에 오를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힘을 냈다.
칠선봉 아래서 휴식중인 아내 |
세석에서 촛대봉을 오르며 |
세석에서 촛대봉을 지나 한참을 가면 지리십경중 하나인 연하선경을 뽐내는 연하봉에 이른다. 꽁초바위에서 내려다 보면 연하봉으로 오르는 구비진 길이 갈대, 야생화 그리고 거뭇한 돌들과 어울려 멋스런 모습을 연출한다. 여기에 엷은 안개마져 내려앉아 머물면 이것이 바로 연하선경이다.
연하봉의 아름다운 경치에 힘을 얻어 넘어가면 천왕봉 아래 숨어있는 장터목 산장이다. 이름처럼 장터에 사람들이 왁자지껄하는 모습에서 따왔는지 늘 사람으로 붐비는 산장이다. 장터목 산장 숙소를 예약하면 대박이라는 표현을 할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이용한다.
옛날에는 남쪽의 산청군 시천마을 사람들과 북쪽에 사는 함양군 마천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물건을 가져다 파는 장이 섰다고 한다. 여기까지 판매할 물건을 이고, 지고 올라왔다는 것이 믿기질 않는다.
장터목산장에서 잠시 휴식을 가진 다음, 고사목이 처연하게 서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는 제석봉으로 올랐다. 6.25 전쟁의 포화도 견뎌낸 울창한 수목이었건만 몰지각한 정부 관료의 힘을 등에 엎은 남벌꾼이 도벌해 온 짓거리가 발각되는게 두려운 나머지 불을 질러 지금 보이는 것처럼 수목은 사라지고 타고 남은 앙상한 고사목만 그 때의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장터목 산장에 도착하다 (12:20) |
안타까운 역사를 가진 제석봉 |
제석봉의 슬픈 사실을 뒤로 하고 길을 재촉하니 오르막 길이 이어지다가 바위로 된 문을 지나야 했다. 천왕봉을 알현하려면 반드시 거쳐가야 하는 통천문이다. 통천문을 지나 가쁜 숨을 몰아쉬면 오르면 드디어 지리산의 정상, 천왕봉이 나온다. 정상석에 새겨진 "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드디어 지리산 종주에 주능선의 마지막 목표 지점에 우리는 도달한 것이다. 기면 샷을 남기고, 천왕봉에서 가장 짧은 하산 코스인 중산리로 하산길을 잡았다. 중산리 주차장에 도착하니 이미 해는 서산 아래로 넘어가고 있었다.
10년 전에 다녀온 지리산 종주를 추억하며, 2015년 10월 다시 지리산 종주를 꿈꾼다. 10년 전에는 가장 짧은 성중(성삼재-중산리)코스를 해봤으니, 이번엔 화대종주(화엄사-대원사)를 다녀오기로 한다. 아래와 같은 대략적인 코스와 밝은 시간에만 이동하며 지리산의 진면목을 보겠다는 원칙을 가지고....
첫 날 : 서울 남부터미널 - 구례 - 화엄사 - 코재 - 노고단 대피소 (1박)
둘째날: 노고단 대피소 - 피아골 -반야봉 - 삼도봉 - 연하천 - 벽소령 - 칠선봉 - 세석 대피소 (2박)
셋째날: 세석 - 연하봉 - 장터목 - 천왕봉 - 중봉 - 치밭목산장 - 삼거리 - 유평리 - 대원사 - 원지 -남부터미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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