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 지리산 산행, 중도 포기
지리산을 처음 찾은 게 아들이 중학교 입학하던 해 여름이다. 아이들과 어릴 때부터 산을 자주 다녔지만 아들은 영 내켜하지 않았다. 청주에 살던 시절 아이들 이모들과 함께 우암산, 태조산 같은 시내에 가까운 산들과 태백산, 조령산, 노고단 처럼 제법 먼 산행도 했다. 그 때마다 걷는 게 별로 탐탁치 않은 표정이었지만 워낙 어린 시절이라 집에 혼자 남아있을 수 없어 따라 나선 것이다. 중학교 입학을 기념하여 지리산 종주 한번 가자는 아빠의 요구에 달리 빠져나갈 명분을 찾지못해 따라 나선 것이다.
내심 아들녀석도 지리산 산행에 대한 도전의식도 작용하였으니 선뜻 따라 나섰을 것이다. 2000년 당시는 요즘처럼 아웃도어 기능성 복장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시절이라, 나는 면바지에 티셔츠로, 아들은 티셔츠에 운동복 바지, 운동화차림이었다.
성삼재에서 출발, 뱀사골 산장에서 점심을 끓여먹고 출발하는 데 비가 내리기 시작해 벽소령산장에 도착할 때까지 비를 흠뻑 맞았다. 다음날 어제 실내에 말린 옷이 아직도 마르지 않고 축축한데 그대로 입고 계속해서 내리는 비를 뚫고 산행을 이었다. 하지만 비에 젖은 돌을 밟고 앞으로 나가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다. 자칫하여 발목이라도 접질리면 더 큰일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벽소령에서 음정으로 하산하는 길을 잡고 지리산행을 포기했다.
하산길을 잡아 내려온 지 한시간이 지나자 하늘이 개이기 시작했다. 산행을 마무리하지 못한 게 아쉬워 다시 길을 되돌려 오르자고 하니 아들이 강력하게 고개를 가로졌는다. 나 또한 다시 올라가기 싫었다. 이렇게 첫번째 지리산 산행은 중도 하산하고 말았다.
2. 천왕봉 일출을 만나다.
천왕봉 일출은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초보적인 기상관측만 해도 천왕봉 일출을 볼 수 있다. 2005년 10월 8일 백무동에 차를 놓고 산행을 시작했다. 일주일 전부터 기상 상황을 꾸준히 관찰하였다. 대기 건조 지수가 높고, 맑은 날이 지속적으로 에보되고 있었다. 백무동 - 한신계곡 - 세석산장 1박 - 연하봉 - 제석봉 - 천왕봉 - 백무동 의 1박 2일 원점회귀 코스를 잡았다. 한신계곡 코스는 백무동에서 세석산장까지 6.5Km가량 되는 거리로 천천히 폭포를 보며 올라가면 5시간 가량 걸린다. 오르는 길에 만나는 폭포가 첫나들이 폭포 - 가내소 폭포 - 오층 폭포 - 한신폭포 순이다.
아직은 초겨울이라 단풍으로 물들기엔 이른 시절이었다. 산행을 하다보면 처음엔 등로를 따라 물소리가 들리는 것이 시원함과 함께 좋지만, 고도를 높여가기 시작하면 빨리 물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면 하고 은근히 바란다. 계곡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능선길이나 산 정상이 가까워지기 시작함을 알려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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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폭포를 마지막으로 가늘게 들리던 물소리는 이제 마지막 흔적을 거두어 아래로 내려간다. 대신 등로에는 공단이 만든 철계단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세석산장이 얼마 남지 안았다. 저녁을 먹고 배정받은 산장 침상에 몸을 뉘였다. 내일 천왕봉의 일출을 보러가야 한다.
새벽 네시에 일어나 산장을 나섰다. 장터목 산장 취사실 한 켠에 배낭을 남겨두고 천왕봉으로 올랐다. 드디어 여섯시 삼십분, 산아래 마을을 덮고 있는 운무를 뚫고 지리산 위로 해가 떠오른다. 떠오르고 있는 햇살이 제일 먼저 반야봉 정상을 비추고, 이어서 촛대봉을 비추더니 천왕봉 정상석을 빠르게 훑어내리듯 햇살이 화살처럼 날아와 박힌다. 일출을 기다리던 산객들이 일제히 환호를 지른다. 나이가 지긋하신 어머니들은 두 손을 모으고 연신 기도를 하고 소원을 빌어 보낸다. 천왕봉 일출을 맞은 행운이 우리에게 내려왔다.
3. 장터목에서 꽁꽁 언 몸 대원사로 하산하다.
무작정 아침에 동서울로 가서 백무동행 버스에 올랐다. 06:30에 출발하는 버스가 백무동에 12:00에 도착한다. 한신계곡을 따라 세석산장에 올랐다. 날씨가 워낙 사나워 산행에 나선 이들이 적을가 싶어 세석을 버리고 오늘은 장터목 산장에서 묵을 요량으로 세석을 나섰다. 촛대봉 바위에 달라붙어있는 눈꽃이 얼마나 바람이 세고 날씨가 사나운지를 알려준다.
장터목에 도착하니 예상한 것보다 훨씬 숙박객이 많았다. 저녁을 해먹고 방배정을 기다렸다. 우선 예약한 사람 순으로 침상 배정이 끝나고, 예약없이 나처럼 무작정 도착한 산객들을 위해 복도, 계단 등의 빈자리에 어거지로 우겨넣는 침상배정이 이어진다.
내가 받은 자리는 공용 마루와 숙소 사이를 이어주는 복도였는데, 마루바닥 밑에서 바람이 올라와 전혀 난방이 되질 않는 곳이다. 가지고 간 등산복과 양말을 모두 껴입고 두 장의 모포를 덮었는데도 몹시 추워서 도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지금은 산장을 예약하지 않은 산객은 가차없이 내좇아 하산토록 규정이 엄격하게 변경되었다고 한다. 아주 잘 한 결정이다. 요행을 바라고 예약없이 산행에 나서는 퐁조는 사라져야 마땅하다.
너무 추워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한 삼십분 폭~ 잠에 들었다 깨었다. 시계를 보니 일어나 채비를 해야 할 시간이다. 뜨뜻한 라면 국물을 들이키고 배낭을 꾸려 천왕봉으로 올랐다. 백무동으로 하산하려면 배낭을 놓고 가도 되지만 오늘은 일출을 보고 대원사로 내려갈 참이다. 칼바람이 부는 천왕봉 정상에는 사람들이 추의를 피하려고 정상석 봉우리 아래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다. 드디어 해가 떠올랐다. 천왕봉 그림자가 반야봉 오르쪽에 뽀죽하게 그려져 있다.
천왕봉 일출은 맞이할 때마다 경외감을 갖게한다. 자연이 인간에게 주는 푸근함과 함께 경망되지 말고 진솔하게 살 것을 주문하고 있는 느낌이다.
하산길은 늘 해왔던 중산리나 백무동이 아니고 대원사 계곡으로 내려간다. 중봉을 거쳐 개인 산장인 치밭목대피소에서 잠시 휴식을 갖고 물이 말라붙어버린 무재치기 폭포를 지나 하염없이 지루하게 걸었다. 대원사 앞 주차장까지....
하지만 어제와 달리 햇살은 그지없이 다사로왔다. 싱그럽게 익어간 산청 마을 어귀에 달려있는 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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