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복궁의 이궁을 세워진 궁궐.
창덕궁은 1405년 태종에 의해 지어졌습니다. 조선 개국 후 규모가 큰 경복궁이 창건되었는데도 태종이 새로운 궁궐을 세운 까닭은 무엇일까요? 태종은 경복궁의 형세가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으나 실질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던 것 같습니다. 두 번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정적 정도전과 이복동생들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태종으로서는 그 피의 현장인 경복궁에 기거하는 것이 꺼
려졌을 것이다.
창덕궁이 세워짐으로써 조선 왕조의 궁궐 체제는 법궁(法宮)-이궁(離宮)의 양궐 체제가 됩니다.
시 기 | 법 궁 | 이 궁 |
임진왜란 이전 | 경복궁 | 창덕궁, 창경궁 |
임진왜란 이후 | 창덕궁, 창경궁 | 경희궁 |
고종이후 | 경복궁 | 창덕궁, 창경궁, 경운궁, 경희궁 |
대한제국 | 경운궁 | 여타궁궐 기능 상실 |
경복궁이 평평한 지대 위에 좌우 대칭되는 정형화된 궁궐로 지어졌는데 반해, 창덕궁은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응봉산 자락을 크게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전각들을 지세와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건축하여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창덕궁 동쪽에 세워진 창경궁(昌慶宮)과 함께 ‘동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습니다. 경복궁은 아시는 바와 같이 북궐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죠. 또 남쪽에는 국가의 사당인 종묘(宗廟)가, 북쪽에는 왕실의 정원인 후원(後苑)이 붙어 있어서 조선 왕조 최대의 공간을 형성하였습니다.
2. 조선의 마지막을 함께 한 궁.
경복궁의 이궁(離宮)으로 창건했지만, 이후 임금들이 주로 창덕궁에 거주하면서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임금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후궁같은 궁궐이었던 셈이죠. 임진왜란 때 한양의 궁궐들이 모두 불타버렸는 데 경복궁은 그 터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재건되지 않고 1610년(광해 2)에 창덕궁이 다시 재건됩니다. 광해군은 유사시를 대비해 경희궁을 짓고 이궁으로 삼지요.
하지만 창덕궁은 광해군을 폐위시키는 인조반정으로 대부분의 전각들이 소실되었다가 다시 지어졌고, 정조를 이은 순조임금 때에 다시 화재로 정전들이 소실되는 등 여러차례 화재와 재건을 반복하지만,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까지 조선 후기 270여 년 동안 조선 후기의 법궁으로 사용되었지요.
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이 중건되어 법궁의 지위를 되찾게 되고, 창덕궁은 이궁이 됩니다. 이후 일제의 침략으로 일부 전각이 헐리거나 왜곡되고 맙니다. 결국 일제의 강압과 친일파의 사욕으로 순종은 1910년 8월 창덕궁 흥복헌에서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고 일본에 주권을 넘겨주는 치욕을 감내하였던 궁입니다. 1926년 순종이 승하하면서 왕과 함께 한 창덕궁의 역사가 마감됩니다.
3. 세계문화유산 창덕궁
1991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으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습니다. 한양 도성 내에 남아있는 궁궐 중에서 원형이 가급적 많이 남아있고, 자연을 변형시키지 않고 산자락을 따라 그 안에 전각들을 살포시 얹어놓은 형태로 한국 궁궐 건축의 조형미를 대표할 수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였지요. 특히 창덕궁 후원은 한국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손꼽힙니다.
현재까지 세계문화유산에 올라있는 유적은 총 12곳 입니다. 창덕궁, 수원화성, 석굴암과 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인돌 유적(고창, 화순, 강화),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 조선왕릉, 역사마을(하회와 양동), 남한산성, 백제 역사유적지 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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