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문화유산 이야기/21. 궁궐이야기

[창덕궁] 2. 돈화문에서 금천교를 건너 궐내각사까지

학이시습지야 2016. 4. 2.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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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연친화적인 위치에 서있는 돈화문(敦化門)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궁궐이 창건되고나서 7년이 지난 1412년 건립되었습니다.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의 서쪽에 세웠죠. '敦化'는 큰 덕으로 백성을 가르치어 감화시킴을 도탑게 한다는 중용에 '大德敦化'에서 가져왔다고 합니다. 2층 누각형목조건물로 궁궐 대문 가운데 가장 큰 규모이며, 3칸이 아닌 5칸으로 되어있는 출입문과 월대를 두어 궁궐 정문의 위엄을 갖추었습니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 때 출입문으로 사용했고,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습니다. 원래 돈화문 2층 누각에는 종과 북을 매달아 통행금지 시간에는 종을 울리고 해제 시간에는 북을 쳤다고 합니다. 돈화문도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이듬해인 1609년에 재건되었습니다.
 


  돈화문을 들어서면 왼편 담장을 따라 수령이 300~400년가량 되는 회화나무가 8그루 서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임진왜란후 재건될 당시에 심어진 것으로 보고 있지요. 옛날 중국 주나라때 회화나무 아래에서 삼정승이 나랏일을 논의하였다는 유래와 함께 학식 높은 선비가 사는 마을에도 흔히 심어 학자나무라고 부르는 이 나무를 조정신료들이 나랏일을 돌보는 곳에 심어 놓은 것도 왜란을 겪은 아픔을 다시는 반복하지말고 정사를 올바르게 펼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지는 않을까요?


2.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석교, 금천교(錦川橋)

  예로부터 궁궐을 조성할 때에는 궐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명당수를 건너게 하였습니다. 이 물은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해주는 경계 역할을 하므로 금천(禁川)이라고 하며, 창덕궁의 금천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돈화문 동쪽 궐 밖으로 빠져 나가게 되지요. 1411년 금천에 다리를 놓았는데, 비단처럼 아름다운 물이 흐르는 개울에 놓인 다리라 하여 ‘금천교(錦川橋)’라 불렀고,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로서 옛스러움과 멋스러움을 함께 간직하고 있습니다. 경복궁에 있는 영제교와 같이 금천교에도 서수(남쪽:해태, 북쪽:거북,  난간돌출부: 천록)와 홍예에 귀면이 섀겨져 있어 궁궐을 수호하고 잡귀를 쫒는 역할을 하고 있지요.

   

3. 궁궐중에서 유일하게 복원되어 있는 궐내각사

  조선시대 관청은 대부분 궐 바깥 육조거리 양쪽에 있었지만,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기 위해 특별히 궁궐 안에 세운 관청들을 궐내각사라고 불렀지요. 인정전 서쪽 지역에는 가운데로 흐르는 금천을 경계로 동편에 약방, 옥당(홍문관), 예문관이, 서편에 내각(규장각), 봉모당(奉謨堂), 대유재(大酉齋), 소유재 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임금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근위 관청이며, 여러 부서가 밀집되어 미로와 같이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지요. 일제강점기 때 규장각, 대유재, 소유재는 단순한 도서관으로 기능이 변했다가, 그나마도 소장 도서들을 경성제국대학 도서관으로 옮기면서 규장각과 봉모당 등 모든 전각들이 헐리고 도로와 잔디밭으로 변해 버려져 있던 것을 2000~2004년에 걸쳐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으로 우리를 맞이하고 있지요.


4. 정조 개혁정치의 산실, 규장각  

  회화나무가 서있는 마당을 지나 궐내각사로 들어서면 규장각과 마주합니다. 규장각(奎章閣)은 정조가 즉위하던 해인 1776년 궁중에 설치한 왕립도서관이지요. 규장()’이란 말은, 바로 임금의 어필과 어제를 가리키는 가리키는데, 즉위 초에는 역대 왕들의 시문과 글씨를 보관하는 왕실 자료실로 지었지요. 원래는 창덕궁 후원에 2층으로 지었는데, 1층은 규장각, 2층은 주합루라고 불렀습니다.


  규장각은 차츰 학문을 연구하고 정사를 토론케하여 왕의 정치를 보좌하는 한편, 외척과 환관의 세력을 눌러 왕권을 강화하고, 개혁정치를 추구하면서 문예부흥에 대한 의지를 뒷바침하는 장소로 발전합니다. 이러한 기능을 수행하기에 후원에 위치한 규정각은 임금이 자주 드나들기에 불편하였지요. 그래서 1781년 이곳으로 옮겼습니다. 정조가 승하한 이후에는 단순한 왕실도서관 기능만 남게되었으며, 일제시대에 규장각 도서는 지금의 서울대학교로 이관되어 지금까지 보관되어 있습니다. 

 

  규장각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각신이라고 불렀지요. 각신은 사관의 역할과 함께 정사를 토론하고 책을 편찬하는 등의 일을 수행하였습니다. 정조는 당파나 신분에 구애 없이 젊고 참신한 능력 있는 젊은 인재들을 규장각에 모아 개혁정치의 파트너로 삼았지요. 정약용을 비롯한 걸출한 학자들이 많이 양성되었는데, 특히 실학자로 알려진 박제가ㆍ유득공ㆍ이덕무ㆍ서이수와 같은 서얼들을 적극 등용하여 조선후기의 문화중흥을 이끌어 가는 두뇌집단의 산실이 된 것이지요.


  규장각 옆에는 검서청이 자리하고 있는데 독립된 관청이 아니고 규장각의 검서들이 입직(당직)하던 규장각의 부속건물입니다. 이들은 돌아가면서 임금의 갑작스런 방문이나 질문에 대비하여 이곳에서 밤새 입직하였다고 합니다.  


5. 정조의 인재육성 초계문신제의 실시

  정조는 젊은 관리들이 규장각에서 재교육을 받는 제도인 초계문신() 제도를 신설하여 시행하였습니다. 이것은 이미 과거를 거친 사람 가운데 당하관() 출신으로 37살 이하의 젊은 인재를 뽑아 3년 정도 특별 교육을 시키는 제도지요. 초계문신으로 선발된 이들은 본래 직무를 면제하고 연구에 전념하게 하되, 1개월에 2회의 구술고사인 강경()과 1회의 필답고사인 제술로 성과를 평가하였습니다. 정조가 친히 강론에 참여하거나 직접 시험을 보여 채점하기도 하였지요. 교육과 연구의 내용은 물론 유학을 중심으로 하였으나 문장 형식이나 공론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 경전의 참뜻을 익히도록 하였으며, 40세가 되면 졸업시켜 익힌 바를 국정에 적용하게 하였습니다.

  오늘날 공무원 재교육 제도와 유사한 이 제도의 시행을 통해 정조는 학문적 성과를 바탕으로 한 개혁정치를 추구하고자 하였습니다. 초계문신제도는 1781년 시작되어 정조가 사망한 1800년까지 19년 동안 10여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으며 총 138명이 뽑혔는데, 이들의 명단은 [초계문신제명록()]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초계문신제도는 정조의 친위세력을 양성하는 정치적 장치이기도 하였는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정약용을 비롯해, 서유구, 홍석주, 김조순, 김재찬 등 초계문신을 거친 인물들은 당대 최고의 학자와 관료가 되어 19세기 정치와 문화를 주도하였습니다.


6. 왕실의 제례를 거행하던 선원전

  조선시대에는 역대 임금을 제향()하는 건물로 궁궐 밖에 종묘()가 있고 궁안에는 선원전이 있습니다. 선원전은 경복궁에도 있었고 창덕궁에도 마련되어 있습니다. 임금은 삭망(望,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선원전에 나와서 친히 분향·배례를 하며 탄신일에는 차례()를 드렸습니다.

  선원전은 1695년(숙종 21)에 처음 마련되었는데, 본래 춘휘전(殿)이라는 건물로, 도총부()가 있던 자리에 1656년(효종 7) 경덕궁의 경화당을 옮겨지은 것입니다. 선원전에는 숙종·영조·정조·순조·익종·헌종의 어진()이 봉안되게 되지요. 선원전 주위에 제물을 만들던 진설청과 내찰당이 있고, 제기를 보관하던 의풍각과 임금이 선원전에 오르기 전에 머물던 양지당이 들어서 있습니다.

  1917년 일어난 창덕궁 화재로 창덕궁 후원 서북쪽에 선원전을 새로 지어 어진을 옮긴 이후로는 이곳을 구선원전으로 불리게 되었지요. 선원전은 구조적으로 간결하고 불필요한 장식이 가미되지 않은 건물로서, 조선시대 왕실의 제사용 건물의 유례로 중요합니다. 이곳에 봉안되었다가 새로 지은 선원전에 옮겨졌던 어진은 1950년 6·25동란 중 불타 없어졌으며,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조선시대 임금의 어진은 태조, 영조, 철종, 고종, 순종 다섯분 것만 남아있습니다.


7. 궐내각사에 대제학도 있고 약방도 있고..

  금천을 건너 선원전을 돌아 앞으로 나오면 약방(藥房)이 나옵니다. 영화 광해에서 기미상궁이던 사월이 독이 든 죽을 먹고 피를 토하자 사월이를 들쳐앉고 내쳐 달려간 곳이 바로 약방입니다. 조선시대 궁중의 의약을 맡은 관청으로 내의원이라고 합니다. 내의원에는 허준과 같은 명의와 함께 내의녀도 있었습니다. 중종의 주치의로 대장금이 바로 내의녀의 최고자리죠. 약방의 책임자를 도제조하고 하고 약을 조제하는 제조상궁도 여기에 속하죠. 약방은 순종에 이르러 불에 탄 창덕궁을 개조하면서 약방이 헐려 성정각으로 옮겨졌습니다.


  옥당(玉堂)은 조선시대 삼사의 하나인 홍문관으로서 궁중의 경서와 사적을 관리하고 임금의 자문에 간언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입니다. 홍문관이 맡아보던 일을 정종시대에는 집현전이 맡았었지요. 세조가 단종을 폐하자 집현전 학사였던 사육신이 반기를 들고 단종복위를 도모한 일이 있고부터 집현전을 없애고 그 업무를 예문관으로 이관하였다가 양성지의 건의로 장서관리 업무를 따로 떼어 홍문관에서 하도록 하였지요. 이후 성종조에 이르러 학술과 언론기능까지 가져와 왕의 자문에 응하는 임무까지 수행합니다. 따라서 임금이 펼치는 정사에 대해 옳고 그름을 간하거나 대신들의 비리를 임금에게 고하는 역할이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 삼사가 직언을 하는 제도로 정착이 됩니다. 홍문관을 대표하는 대제학은 비록 정이품이나 삼정승만큼이나 대우를 받았던 벼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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