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창덕궁 안에 있는 청와대, 선정전(宣政殿)
인정전에서 선정문으로 들어서면 편전인 선정전과 마주합니다. 경복궁의 사정전과 같은 기능을 하던 곳입니다. 창덕궁이 세워질 당시에는 조계청이라 불리웠는데, 세조가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며 선정전으로 이름을 바꾸었지요. 선정전은 광해군에 의해 재건되어 그 모습이 오늘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창경궁 인정전과 함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몇 안되는 전각입니다.
사정전처럼 정전 바로 뒤에 있지않고 바로 옆에 붙어있습니다. 자연지형을 거스르지않고 전각을 배치한 창덕궁만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불어 선정문에서 전각까지 비를 피할 수 있는 행각(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는 데다가 청기와를 이고 있습니다. 일반 기와와 달리 청기와는 비용이 비싸다는 이유로 임진왜란이후 피폐해진 나라 살림에도 불구하고 청기와를 올려 사치를 하였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답니다. 기록에 따르면 인정전도 처음 창건될 당시에는 청기와가 올려져 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지금 청와대가 이승만정권기에는 경무대라고 하였다가 박정희정권에 들어서면서 청와대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는데, 청와대의 원조는 창덕궁 인정전이나 선정전이었나봅니다. 선정을 배풀라는 의미도 함께...
선정전 안을 들여다보면 사정전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으나 규모가 작고, 개화기의 영향을 받아서 어좌 양 옆에 전등이 달려 있는 것이 이색적이지요. 물론 어좌 위에는 여지없이 일월오악도가 둘러져 있습니다. 편전으로서 선정전은 그리많이 사용되지 않고 오히려 내전인 희정당이 더 많이 사용되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2. 침전에서 편전으로 바뀌어 사용된 희정당(熙政堂)
희정당은 왕의 침전이었으나 조선 후기에 와서는 선정전 대신 편전으로 주로 사용되었다고 기록에 전합니다. 편전인 선정전이 비좁고 종종 국장을 위한 혼전으로 쓰이면서, 침전이었던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지요. 희정당의 원래 이름은 숭문당이었으나 1496년(연산2)에 희정당으로 이름을 바뀌었고, 임진왜란과 인조반정에 두 번이나 소실되었다가 인조25에 다시 지어졌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희정당은 1917년 화재로 소실되자 1920년에 일제는 자금 부족을 이유로 경복궁에 있던 강녕전을 헐어 그 재료를 옮겨다 지은 것입니다. 사실 '동궐도'에 그려진 원래의 희정당은 여러 개의 돌기둥 위에 세운 아담한 집이었고 마당에 연못도 있었습니다. 지금의 희정당은 이 모습과 완전히 다릅니다. 차지하고 있는 면적에 비하여 전각이 너무 크고 주변 환경과 원만하게 어울려 있지 못한 모양새를 하고 있지요. 강녕전을 헐어서 지었다는 징표를 우리는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로 지붕 옆 합각에 새겨진 글자를 유심히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재건된 희정당 내부는 자못 화려하게 꾸며놓았습니다. 중앙에 위치한 거실에는 단청으로 꾸몄고, 양 옆에는 금강산 전도가 그려져 있습니다. 실내장식과 가구등도 서양식으로 모두 바뀌었지요. 전면에 붙어있는 행각에는 자동차 숭하차를 위한 현관까지 마련되어 있습니다. 재료는 오래된 것을 가져왔으나 전각은 근대식 구조로 지어진 전각입니다.
3. 못 다 핀 개혁정치의 꿈, 효명세자(孝明世子)
희정당은 순조의 아들이며 헌종의 아버지인 효명세자가 승하한 곳이기도 합니다. 외모와 총명함은 물론이고 책을 좋아하는 모습까지 할아버지 정조를 빼닮았다고 전해지는 효명세자. 순조의 명으로 19세에 대리청정을 시작한 효명세자는 안동 김씨 세력과 맞서 참신한 인재를 등용하고 개혁정치를 펼치고자 합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희망, 할아버지의 이상, 그리고 조선 백성들의 염원을 채우지 못한 채 22세의 꽃다운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으니, 정사를 돌본 지 겨우 3년 3개월 만이었지요. 효명세자는 후원에 작은 공부방인 의두합을 짓고 이곳에서 독서를 즐겼다고 합니다.
4. 경술국치의 현장, 창덕궁 대조전
창덕궁의 중궁전인 대조전은 원래 왕비의 침전이었는데, 희정당이 편전으로 주로 사용되면서 왕의 침전을 겸하게 됩니다. 희정당 뒤에 위치해 희정당과 비슷한 시련을 겪게 됩니다. 왜란과 내란을 겪었고, 일제강점기 대화재로 소실되자,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 다시 지었지요. 실내에는 왕비가 사용하던 침대와 간단한 다기등이 대청에 놓여져 있습니다. 있고, 책상과 소파, 천정엔 전등이 가설되었지요. 대조전 서쪽으로 가면 신식으로 꾸며진 부엌이 나옵니다. 수라간인데요, 조선시대의 수라간의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수도시설, 저기시설, 오븐등과 같이 신식 주방기기로 꾸며져 있습니다.
이처럼 겉모습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제 모습을 잃어버렸지만, 더욱 슬픈 것은 바로 대조전에 이어져 있는 흥복헌에서 조선 역사에 치욕적인 사건이 벌어진 역사의 현장입니다. 대조전의 부속 건물인 흥복헌은 원래 왕비를 보좌하기 위해 상궁들이 머무는 장소였으나,
1910년 8월 22일 오후 1시. 일체의 출입이 통제된 채 창덕궁 대조전 흥복헌에서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립니다. 순종이 주재하는 어전회의에는 나라를 팔아넘기기로 각본을 짠 내각의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법무대신 이제곤 등의 각료와 시종무관 등이 참석하지요. 이미 일제와 내각대신과 사전에 조율된 어전회의의 토의 안건은 '한일합병조약안'의 최종 승인과 이를 실행토록 내각에 위임하는 회의였지요. 한일합병조약의 내용은
5. 조선시대 궁녀조직
궁녀의 공식명칭은 궁중여관(宮中女官)으로 궁중에서 근무하는 여성을 일컫습니다. 궁녀는 내명부의 품계를 받은 여관과 품계를 받지 못한 천비로 구분됩니다. 여관에는 나인과 상궁이 있고, 천비에는 비자, 방자, 무수리 등이 있습니다. 통상 여관은 나인이나 상궁을 의미합니다.
궁녀조직은 모두 7개 부서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임금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지밀, 궁궐의 의복과 침구를 책임지는 침방, 옷에 수를 놓거나 장식을 다는 수방, 내전 청소와 청결을 담당하는 세수간, 궁궐의 식사를 담당하는 소주방, 음료와 다과를 공급하는 생과방, 세탁과 다림질을 하는 세답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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