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월대를 갖춘 중궁전인 통명전(通明殿)
음과 양이 두루 통하고 하늘의 밝은 기운이 깃들라는 의미인 통명전은 창경궁 내전 건물 중 앞에 월대를 갖추고 있는 전각입니다.
월대를 갖춘 건물은 그곳에 사는 사람이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반증이지요. 즉, 내전의 으뜸 건물로 왕비의 침전이었지요. 성종15년(1484년)에 세워졌으나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고 광해군 때 창경궁 재건시 중건되었습니다. 다시 인조반정 이후 이괄의 난을 겪으며 다시 소실되자 순조 34년(1834년)에 재건되었지요. 다른 궁궐과 마친가지로 무량각 지붕을 하고 있으며 통명전 편액은 순조의 어필입니다.
창경궁 자체가 창덕궁의 이궁이면서 왕실 가족의 생활영역이다 보니 시대에 따라 기능이 자주 바뀌었지요. 통명전도 마찬가지로 주로 왕비의 침전으로 사용하였지만, 중종과 명종비의 빈전으로 사용된 적도 있고, 경종은 편전으로 사용하기도 하였지요.
전각은 월대 위에 기단을 형성하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렸으며, 연회나 의례를 열 수 있는 넓은 마당에는 얇고 넓적한 박석(薄石)을 깔았습니다. 서쪽 마당에는 동그란 샘과 네모난 연못이 있으며, 그 주변에 정교하게 돌난간을 두르고 작은 돌다리를 놓았습니다. 뒤뜰에는 화단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통명전 주위는 지대가 낮아 습하였으므로 솟아나는 샘물을 이용하여 연당을 마련하였습니다. 성종 때에는 구리로 수통을 만들어 설치하였는데 사치스럽다는 신하들의 주청을 받아들여 돌로 대치하였지요.
2. 지혜로운 답변으로 면접고사를 통과한 정순왕후
영조와 정순왕후의 가례가 명정전에서 시작해 통명전에서 마친 것으로 의궤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조가 66세에 15살 어린 소녀 정순왕후를 계비로 들입니다. 왕비를 뽑는 과정을 삼간택이라 하는데 금혼령을 내린 후 후보 천거를 받지요. 이들 중에서 후보군을 6~10명으로 압축하는 과정을 초간택이라고 합니다. 초간택에 뽑히면 4인교를 타고 몸종과 유모, 수모와 함께 궁에 들어오지요. 왕궁의 법도 예절 교육을 받은 다음 2주 뒤에 초간택 후보 중에서 최종 후보 3명을 선발합니다. 이를 재간택이라고 하지요.
통상 왕후는 왕실의 가장 어른이 정하는 데 영조는 친히 재간택된 세사람을 친히 불렀습니다. 세사람이 각각 앉게될 방석에는 부친의 이름이 쓰여진 종이가 놓여있었지요. 다른 두 명은 방석 위에 다소곳이 앉아 영조의 질문을 기다리는 데 정순왕후는 방석 위에 올라앉지를 않고 옆에 앉았습니다. 영조 그 연유를 묻자 '아비의 이름 위에 올라 앉을 수 없아옵니다' 라고 답을 하였지요. 고개를 끄덕인 영조가 세사람에게 똑같이 질문을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더냐?' 다른 두사람은 '산이요, 물이요' 라고 답하였는데, 정순왕후는 '人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사옵니다'라고 하였지요. 또 다시 영조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이더냐?'라고 질문하니 다른 두 후보가 모란과 매화라고 답한데 반해, '목화꽃입니다. 다른 꽃들은 일시적으로 아름다울진 몰라도 목면은 세상 사람들을 따뜻하게 하여 주니 아름답지 않사옵니까.'라고 정순왕후는 대답하여 영조의 마음을 사로잡아 왕후가 되었다고 합니다.
3. 통명전과 장희빈의 저주
장희빈과 인현왕후는 과거 사극에서 단골 메뉴로 등장할 정도로 숙종조에 궁궐에 파란을 일으킨 장본인이죠. 궁녀였던 장옥정은 숙종의 눈에 들어 후궁이 되었고, 왕자 균을 출산하여 희빈의 자리에 오른 인물입니다. 숙종대는 조선 왕조를 통틀어 당파간 정쟁이 가장 심했던 시기로, 왕은 자신의 여자들을 이용해 당쟁 속에서 왕권강화를 도모하였지요. 균을 세자로 책봉하는 과정에서 서인을 격침하고 인현왕후 민씨를 폐위시켰다가, 서인들이 민씨 복위를 꾀하는 과정에서는 남인들을 제거합니다. 왕비까지 되었다가 다시 강등된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해 꼭두각시와 동물의 사체 등을 통명전 주위에 묻어 두었는데, 이것이 발각되어 사약을 받으니 수많은 풍문과 일화를 남긴 채 4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4. 인조의 통한이 묻어있는 양화당
통명전 동쪽으로 나란히 위치한 양화당은 왕이 주로 내전의 접대공간으로 사용하던 곳입니다. 명종이 독서당의 문신들을 불러 시험을 보기도 했으며 철종의 비인 철인왕후가 승하한 곳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인조가 흘린 통한의 눈물을 묵묵히 바라본 곳이지요. 1637년 1월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45일간 청나라와 항전 끝에 항복하고 송파에 있는 삼전도로 내려오지요. 9층으로 마련된 수향단에 앉아있는 청 태종, 홍타이치에게 3배9고두례를 올리는 항복의식을 합니다. 즉, 청 태종을 향해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땅에 찢는 참으로 치욕적인 의식을 임금이 몸소 하게되지요. 항복을 하고 인조가 돌아온 곳이 바로 양화당입니다.
5. 후궁들의 처소, 영춘헌과 집복헌
통명전이 중궁전이었다면 양화당 동쪽에 자리한 영춘헌 일원은 후궁들이 거처했던 곳이지요. 남향인 영춘헌은 내전 건물이며, 집복헌은 영춘헌의 서쪽 방향에 5칸으로 연결된 서행각입니다. 이 건물들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1830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834년에 재건되었지요. 이때 영춘헌은 창덕궁 중희당 부근에 있던 장남궁을 헐어 재건하였습니다. 집복헌에서는 사도세자와 순조가 탄생하였지요. 정조는 순조를 낳은 수빈 박씨를 총애해 집복헌에 자주 출입하면서 가까운 영춘헌을 독서실겸 집무실로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6. 영춘헌과 정조 독살설
영춘헌은 왕이 거처하던 곳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소박한 모습이어서 정조의 검약한 성품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정조는 등에 난 종기가 원인이 되어 49세로 영춘헌에서 승하하였지요. 처음에는 가벼운 종기로 진찰을 받았는데, 이날 의관 서용보를 교체하는 등 정조는 왕실 의관들을 믿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뛰어난 의학 실력을 갖춘 정조는 의원과 직접 의논하고 약방문을 지정해 주는 등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진찰을 시작한 지 불과 15일 만에 죽음을 맞게 됩니다. 정조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정적 정순왕후의 거처인 ‘수정전’이었기에 정조의 독살설은 아직까지도 의문으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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