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중록의 산실 자경전 터
양화당과 영춘헌 사이는 뒤에 앉아있는 동산자락에서 내려온 넓은 너럭바위가 있습니다. 너럭바위 뒤로 자경전 터로 올라가는 계단이 두 곳으로 나 있습니다. 오른쪽 계단은 자경전이 세워질 무렵 만든 것이고, 왼쪽 계단은 일제가 만든 것입니다. 발걸음을 옮기는 계단의 높이가 오른쪽 보다 낮아보이지요. 일본의 신체구조에 맞추다 보니 조선의 것보다 낮게 되었다고 추측됩니다.
계단을 올라서면 높은 언덕위에 자경전(慈景殿)이 있었습니다. 창경궁의 전각들이 손바닥 보듯 내려다보이는 자리이지요. 멀리 남산과 낙산까지도 보이는 곳입니다. 지금은 나무들이 우거진 숲으로 자경전이 있었다는 안내판만 서 있습니다.
자경전은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해 1777년 지은 전각입니다. 아래쪽에 있는 통명전이나 경춘전에 기거해도 상관없지만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더 높은 지대에 거처하여 저 멀리 아버지 사도세자의 사당을 바라볼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사도세자의 사당인 경모궁(景慕宮)은 지금의 서울대학교 병원 안에 전각을 받치고 있던 기단과 전각이 들어서는 문 하나만 남아있지요. 정조는 경모궁에 갈 때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을 거치지 않고 위쪽에 있는 월근문을 사용하여 조금이라도 빨리 가려고 했다고 합니다.
자경전이 있었을 때에는 전각 뒤편에 아름다운 화계(花階)를 조성하여 혜경궁 홍씨가 마음이 울적할 때에 거닐면서 위안을 받도록 했다고 전하고 있지요. 혜경궁 홍씨는 이곳에서 저 유명한 한중록(恨中錄)을 썼습니다. 자경전은 19세기 후반에 철거되었고, 일제는 그 자리에 근대적 왕실 도서관인 장서각(藏書閣)을 세웠습니다. 일제는 무슨 생각을 했던지 1922년 장서각을 철거하고 나무를 심어 동산으로 만들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2. 태실과 성종대왕태실비
한국에서는 태어나자마자 한 살이 됩니다. 뱃속의 태아도 온전한 존재로 보아 나이를 계산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궁궐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3~7일 사이에 길한 날을 잡아 태와 태반을 깨끗이 씻고 술로 갈무리해 태항아리에 넣었습니다. 여러 단계를 거쳐 밀봉된 태항아리는 수개월 내에 태실을 선정해 봉안했지요. 원래 경기도 광주에 있던 성종태실을 1930에 창경궁으로 옮겨왔습니다. 일제는 전국에 흩어져 있던 조선임금의 태실을 서삼릉으로 모두 이전하였는데, 그 중 태실과 태실비 유지관리상태가 가장 양호한 것을 박물관의 진열품으로 사용하기 위해 옮겨 왔다고 합니다.
3. 기상학의 선구자 풍기대
자경전 터에서 태실로 가는 길에 영조 대에 만들어진 풍기대와 그 옆에 해시계인 앙부일귀를 만나게 됩니다. 풍기대는 화강암을 정교하게 다듬어 만들었는데, 아래의 받침돌은 네모꼴로 그 곳에 모양이 마치 소반(小盤)과 같은 상(床)을 조각하였으며, 그 위로 인동초무늬를 도드라지게 새긴 팔각기둥을 세운 모습입니다. 팔각기둥 맨 위의 중앙에는 깃대를 꽂는 구멍이 있고, 이 기둥 옆 33cm 아래에는 빗물이 고이지 않도록 배수시키는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풍기대는 꼭대기에 나 있는 구멍에 풍기죽(風旗竹)을 꽂고, 24방향으로 풍향을 측정하였습니다. 동궐도 속의 창경궁 중희당 앞마당에 그려져 있는 풍기대를 자세히 살펴보면, 풍기대의 구멍에 가늘고 긴 장대인 깃대를 꽂았는데, 그 깃대 꼭대기에는 가늘고 매우 긴 깃발을 달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깃발이 날리는 방향으로 풍향을 재고, 나부끼는 정도로 바람의 세기를 재었던 것이지요. 지금도 경복궁과 창경궁에 영조때 제작하여 사용하던 풍기대가 한 점씩 남아 우리의 발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4. 왕이 농정을 살피던 곳
춘당지는 현재 두 개의 연못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뒤쪽의 작은 연못이 조선 왕조 때부터 있었던 본래의 춘당지입니다. 면적이 넓은 앞쪽 연못은 원래 왕이 몸소 농사를 행하던 11개의 논이었던 내농포였습니다. 이곳에서 임금이 친히 쟁기를 잡고 소를 몰며 논을 가는 시범을 보임으로써 풍년을 기원하였습니다. 1909년 일제가 창경궁을 파괴할 때 이 자리에 연못을 파서 보트를 타고 놀이를 즐기는 유원지로 만들고 케이블카까지 설치하여 완전한 위락시설로 전락시켜버렸지요. 연못 안에 있는 섬은 1986년에 새로 조성하였습니다.
내농포는 원래 궁중에 채소를 납품하던 채소밭과 그 관청을 말하였지요. 창경궁 안에는 내농포에서 관리하는 논과 뽕밭이 있었습니다. 왕과 왕비는 여기서 각기 농사와 양잠의 시범을 보이며 농정을 살폈지요. 농업을 국가의 기반 산업으로 삼았던 조선 왕조에서 왕과 왕비는 각기 농사와 양잠을 주재하는 상징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던 것입니다.
5.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온실
춘당지 위에는 1909년에 건립한 국내 최초의 서양식 온실인 대온실이 서있습니다. 철골 구조와 유리, 목재가 혼합된 건축물로 동물원과 함께 일제가 순종을 창덕궁에 유폐시킨 뒤 왕을 위로한다는 명목으로 지은 것입니다. 일본 황실 식물원 책임자였던 후쿠와가 1907년 설계하고 프랑스 회사에서 시공했는데 당시에는 동양 최대의 규모였지요. 처음에는 대온실 후면에 원형 평면의 돔식 온실 2개를 서로 마주 보게 세웠으나 후에 돔식 온실 2개는 철거하여 현재 대온실만 남아 있습니다. 비록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건물이지만 최초의 서양식 온돌로 근대문화유산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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