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함인정 앞의 넓은 마당
창경궁이 훼손되고 복구되는 과정에서 미로처럼 복잡하던 행각들은 대부분 복원되지 않아 넓은 공간에 건물만 홀로 서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함인정 앞의 넓은 마당은 동궐도에도 그대로 나와 있어, 이곳에서 각종 공연이 열렸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함인정의 전신인 인양전도 이러한 용도로 쓰였던 기록이 보입니다. 1486년(성종17)에 인수대비, 인혜대비가 왕실 여인들을 위해 이곳에서 연희를 베풀었는데, 이때 얼마나 사람이 많았던지 한 부인은 가마를 잘못 타서 도착해 보니 남의 집이었다는 재미난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함인정은 원래 인양전(仁陽殿)이 있던 터에 광해군이 지었던 인경궁의 함인당을 1633년(인조 11) 옮겨와 지은 정자입니다. 남향에다 앞마당이 넓게 트여 있어 왕이 신하들을 만나고 경연을 하는 곳으로 이용하였지요. 1830년에 소실되었다가 1833년에 재건되었습니다. 정자에는 도연명의 작품으로 알려진 다음과 같은 시가 동서남북 네 방향에 한 줄씩 걸려 있습니다.
春水滿四澤(춘수만사택) - 봄이오니 사방에 있는 못에 물이 그득히 차 있고
夏雲多奇峰(하운다기봉) - 여름에 젖은 구름이 기암 봉우리마다 걸쳐 있네
秋月揚明輝(추월양명휘) - 가을밤 밝은 달이 사방을 밝게 비추고 있으니
冬嶺秀孤松(동령수고송) - 겨울바람에 재너머 언덕에 외로운 소나무가 우뚝해보이누나.
2. 임금의 침전인 경춘전과 환경전
경춘전은 성종이 1483년에 인수대비를 위해 지은 대비의 침전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조와 헌종이 이곳에서 탄생하고 많은 왕후들이 여기서 승하한 것으로 보아, 대비뿐 아니라 왕비와 세자빈도 많이 사용한 듯합니다. 혜경궁 홍씨가 정조를 낳을 때 사도세자가 경춘전에서 흑룡이 내려오는 태몽을 꾸어 이를 신기하게 여기고 꿈에서 본 용을 그려 걸어두었다고 전해집니다. 정조는 본인의 탄생을 기념해 경춘전 내부에 ‘誕生殿(탄생전)’이라고 친히 쓴 현판을 걸기도 했지요. 지금 걸려있는 편액은 순조의 어필입니다.
경춘전이 대비나 왕비들이 사용한 것에 비해 환경전은 왕이나 세자가 기거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곳에서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돌아온 소현세자가 승하하였고, 순조의 뒤를 이어 왕위를 이을 효명세자가 21살의 나이에 순조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곳도 바로 이 곳입니다. 영조 재위시절에는 이곳을 편전으로 사용하면서 사도세자에 대리청정을 명하고 정무를 보고받던 곳이었습니다. 조선시대 후기 영민하고 시대를 뛰어넘을 식견을 갖춘 소현, 효명 두분의 세자가 병사하지 않고 각각 20년 가까이 보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렸다면 어땠을까 하는 역사의 가정을 해보게 합니다.
두 건물 모두 창경궁 창건 당시 세워졌다가 임진왜란, 이괄의 난, 순조 연간 대화재 등으로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834년(순조 34)에 재건한 것입니다.
3. 창경궁으로 돌아온 소현세자의 안타까운 죽음.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가 9년 만에 창경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때 백성들이 홍화문 앞까지 길을 가득 메우고 눈물을 흘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청나라에 머무르는 동안 소현세자는 단순한 인질이 아니라 외교관의 역할을 해냈으며, 서양의 발전된 문물을 접하면서 장차 조선을 새롭게 변혁시키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었지요. 그러나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갑자기 병이 나, 병석에 누운 지 3일 만에 창경궁 환경전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망 당시 소현세자는 새까맣게 변해 있었고 뱃속에서는 피가 쏟아졌다고 합니다. 여러 정황으로 미루어 청나라의 굴욕적인 항복을 한 인조에게 청나라 신임을 얻고 있던 세자가 도저히 용서가 안되었겠지요. 그래서 독살했으리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소현세자가 왕이 되었다면 우리나라 근대사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4. 환경전에서 중종을 진료한 대장금
조선시대의 의녀들 중 유일하게 왕의 주치의 역할을 했던 이가 대장금입니다. 대장금은 1515년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출산을 맡았고, 1522년 자순대비의 병을 치료한 후 이 공으로 중종의 치료를 전담하게 됩니다. 대신들은 의원이 아닌 일개 의녀를 주치의로 삼은 것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중종은 의원보다 대장금을 더욱 신뢰하여 마지막까지 대장금에게 진료를 맡겼지요. 중종은 오랫동안 앓아 오던 풍증과 그에 대한 합병증으로 1544년(중종 39)에 환경전에서 승하하였습니다. '중종실록'에는 1524년부터 1544년까지 20년 동안 수차례에 걸쳐 대장금의 진료기록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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