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지 두텁지 않은 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늘상 여행을 할 때 욕심을 내보는 것이 날씨다. 사진에 채도를 높이려면 햇살이 쨍하고 간간리 하얀 구름이 하늘에 걸쳐 있으면 금상첨화다. 일기예보에 구름이라고 했으니 어쩔 수가 없다.
오늘 걸어볼 코스는 슬로길 1코스 서편제-화랑포길, 2코스 사랑길, 3코스 고인돌길, 5코스 범바위길이다. 대략 20여Km 가량인데, 무리하지 않고 체력이 닿는데까지만 걷기로 했다. 숙소에서 내려다 보이는 포구가 참 아늑해 보였다. 화랑포와 도락리 사이에 안으로 움푹 활처럼 휘어 들어온 포구에는 전통적인 고기잡이인 독살이 둘러져 있다는데 밀물 때인지라 쌓아논 돌들이 물 속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 포구에 서있는 해송을 지나쳐 서편제 길로 유명한 언덕받이로 길을 잡았다. 오르는 길 옆으로 코스모스가 밭에 가득히 피어있다. 마치 식용작물을 대신해 코스모스를 재배한 것처럼 여기저기 제법 넓은 밭에 널려 있다.
서편제 촬영지에서 바라본 포구가 아늑하다. |
포구에서 서편제길 가는 양 옆에 조성된 코스모스 단지 |
드디어 서편제길이 눈에 들어왔다. 당리 언덕에 자리한 서편제 길은 청산리를 여행오는 분이라면 빠짐없이 찾아보는 명소 길이다. 판소리 중 동편제보다도 더 애절하고 남도의 한이 한주먹씩 뚝뚝 떨어진다는 서편제. 서편제는 1976년에 소설가 이청준이 발표한 소설을 김명곤이 각색하고 임권택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1993년에 상영한 동명 소설의 영화이다. 바로 이 길 위에서 서편제의 주인공 유봉(영화를 각색한 김명곤이 연기함)과 송화, 동호 세사람이 진도 아리랑을 부르며 돌담길을 내려오는 장면을 5분 동안의 롱 테이크를 촬영하여 유명하다. 돌담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극중 세사람이 멋드러지게 부른 진도 아리랑이 흘러나온다. 몇몇 아주머니 관광객이 그 노래에 가락을 맞춰 흥얼거리기도 한다. 돌담길 끄트머리에는 아담하게 지은 '봄의 왈츠' 촬영 무대가 그대로 남아있다.
길 옆 도락리 포구가 내려다 보이는 자리에 서편제 세트장을 옮겨놓은 주막이 꾸며져 있다. 관광객이 많을 때는 음식들을 팔았다고 하는데 영업이 시원찮아선지 문을 닫고 방문객은 포구 사진만 담고 떠났다. 방안을 들여다 보니 LCD TV도 걸려있다. 초가집에 LCD TV가 걸려있으니 참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원래 서편제 세트장은 당리 마을 안에 들어있고 지금도 관리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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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편제 주막에서 본 포구 |
서편제 촬영가옥 모형 주막 |
서편제 촬영가옥 |
봄의 왈츠 촬영지를 뒤로하고 화랑포길로 길머리를 잡았다. 잔뜩 찌뿌려있던 하늘이 간간히 푸른 빛을 내 비추어주기도 한다. 구비구비진 산길이었을진대 관광객을 위하여 포장도로로 잘 닦아놓았다. 간간히 차량에 올라 쉽게 슬로길을 빠르게 주파하는 패스트 관광객이 좁을 길을 지나간다. 아내는 차를 안가지고 온 게 정말 잘한 결정이라고 한다. 돌섶에 자란 쑥부쟁이가 우리를 반겨주는지 바람에 손을 흔든다. 한시간 가량을 걸었나 보다. 몸뚱이가 자꾸 쉬었다 가라는 신호를 보낸디. 화랑포에 다다르니 이제는 하늘에 파란색이 더 넓게 퍼져 있고, 간간이 땀이 이마에 맺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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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길 1코스 화랑포공원에 마련된 원두막에서 잠시 다리를 쉬게 했다. 딸아이 냉장고에서 강탈(?)해온 거봉포도와 아침에 마트에서 산 과자를 먹으면서 싱그러운 남해 바다 바람에 고단함을 풀어내었다.
화랑포 공원에서 2코스 사랑길로 가기 전에 예쁘게 꾸며놓은 포토존을 만나게 된다. 남해 푸른 바다가 드넓게 펼쳐진 화랑포를 배경으로 '청산도는 쉼이다'라는 포토존이 만들어져 있어 예쁜 사진을 얻어가게 한다. 두시간 가량을 쉬엄쉬엄 경치도 보고, 얘기도 하고, 사진도 찍고, 다과도 먹다보니 슬로길 1코스가 마무리되었다.
화랑포공원 원두막에서 |
"청산도는 쉼이다" |
슬로길 2코스 들머리에는 청산도의 장례문화인 초분을 알리는 유적과 초분 체험장이 세워져 있다. 초분은 일종의 풀무덤으로 섬지역에서 행해지던 장레문화이다. 시신을 땅에 바로 묻지않고 관을 땅 위에 올려놓은 뒤 짚, 풀 등으로 이엉을 덮어두었다가 2-3년이 지난 후 육신의 살이 모두 사라지고 나면 뻐를 골라 땅에 묻는 방식이다.
1코스의 포장길과 달리 2코스는 산비탈에 길을 내다보니 등산길을 걷는 것처럼 약간의 체력을 요구했다. 더구나 오르내리막이 있어 때로 가뿐 숨을 내쉬어야 하기도 했다. 하지만 탁 트인 바다를 한쪽에 끼고 걷는 길이라서 그다지 무료하진 않다. 조금 오르다 보니 자전거로 산 길을 가로지르려는 MTB 여행객이 많이 힘들어 보인다. 산비탈을 깎아 만든 길이라 자전거에 올라타고 가는 것이 제법 위험해 보이던지 자전거를 어깨에 둘러메고 걸어간다. 관광 팸플릿에 자전거로 가기 어려운 코스를 미리 표기해서 안내하는게 나을거 같다.
2코스가 사랑길로 붙여진 건 들머리를 조금 지나서 알게 되었다. 길 난간에 서있는 줄에 연인들이 사랑의 약속을 적은 나무 메모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우리도 약속을 매달아 보려 했는데, 나무 메모지를 나누어 주는 곳이 없다. 나무 메모와 함께 줄에 매어달 케이블 타이마져 없어 그냥 사랑의 메모는 마음속에다 달아놓았다. 당리재에 도착하니 아까 보았던 서편제 길이 가까이 보였다. 당리재에서 방향을 우측으로 90도 꺾어 읍리앞개로 내려갔다. 시간이 제법 흘렀고, 점점 체력에 한계도 오는 거 같았다.
읍리앞개에서 2코스 사랑길이 끝나고 3코스 고인돌 길이 이어진다. 읍리앞개에서 당리마을로 올라가는 앙 옆으로 한창 추수에 여념이 없는 마을 어르신들이 굽은 허리를 잡고 계신다. 우리는 팔자가 좋아 이렇게 여유로이 슬로길을 걷고 있는데, 저 분들은 우리를 보고 무어라 하실까? 괜시리 일하고 계신 어르신들 옆을 지나갈라 치면 저절로 고개를 숙이게 된다.
어느 논에선 콤바인으로 벼베기와 탈곡을 한번에 하고 있는데, 다른 논에는 연로하신 분들이 낫으로 추수를 하고 계신다. 낫으로 추수를 하게되면 이어지는 과정도 제법 험난한 노동의 연속이다. 추수한 벼를 적당한 두께로 볏단을 묶어야 하고, 벼 이삭이 탈곡기에 털릴 정도로 마르면 탈곡을 하고, 건조를 해야 한다. 청산리 시골길 걷다보면 도로 위에 벼를 말리는 광경을 자주 보게 된다. 아침에 널고나서 오전에 한번 오후에 한번 골고루 마르게 뒤집어 주어야 한다. 가을에는 맑은 날이 많아 다행인데 가끔 날궂이를 할라치면 여간 힘든게 아니다. 비라도 오면 하던 일을 이내 접고, 널어놓은 벼부터 단도리해야 한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추수하는 모습 |
탈곡한 벼는 최소 3~4일은 볕에 말려야 한다. |
당리 마을로 올라서서 서편제 촬영 세트장을 찾아가는 데 길을 잃었다. 결국 1코스 서편제 길과 만나는 곳에 이르렀다. 오전에 서편제 길을 꽉메웠던 인파가 물러가서인지 오후 세시를 넘어선 시각엔 거짓말처럼 인적이 한산하다. 다시 서편제 길에서 사람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우리 둘만의 시간을 서편제 길에 깔아놓고 그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그리고 아까 올라오는 도중엔 찾지못한 서편제 촬영 세트장이 언덕에서 보니 발견할 수 있었다. 집집마다 지붕에 모두 개량 기와나 슬레트로 덮여있는데 유독 한 가옥만 초가지붕으로 되어 있었다. 그 집이었다.
막상 서편제 길에 다시 오르니 피로도 몰려 오고 어제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한 아내가 숙소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오자는 제안에 의기투합하여 숙소로 돌아왔다. 오늘은 원래 걷기로 한 슬로길 5코스는 내일로 미루고 오늘 일정을 접었다.
날씨가 맑기를 바랬는데 빗방울이 후두둑거리고 밤하늘에 별이 구름 속에 숨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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