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단법인 궁궐문화원에서 주관하는 문화유산해설사 53기 과정을 등록하고 본격적인 교육과정이 시작되었다. 교육과정의 주 내용은 서울 한수 이북인 구도심에 거만하게(?) 자리를 틀고 앉아있는 5대 궁궐에 대한 구조와 역할을 이해하고 아울러 궁궐 각각의 전각들 속에 스며져 있는 궁궐문화를 함께 알아보는 시간이 될거 같다. 나아가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궁궐을 고리타분한 유적이 아니라 우리의 미래를 밝혀나가는 데 역사적인 실패와 교훈을 통해 일깨워주는 살아있는 교육현장으로의 역할을 위한 해설사로서의 기본적인 소양을 함께 구비할 수 있는 과정이다.
http://gungstory.com/01_cultural/01sub_05_02_view.asp?idx=1095&gopage=1&cond=&word=&mnid=42
1. 1392년 7월 조선이 개국하다.
서기 1170년1270년까지 약 100년 가까이 지속된 무인정권시대. 고려의 쇠락이 여실히 드러난 사건, 정중부, 이고, 이의방 3인이 주동이 되어 무신정변을 일으켜 국사가 무인의 손에 의해 농단되기 시작하였다. 정변이 일어난 뒤 주역 3인방 사이에서 다시 권력투쟁이 일어났다. 먼저 이고가 제거되고 이어서 이의방과 그의 일족이 정중부에 의해 척살되었다.
이때 이의방의 동생인 이린이 간신히 몸을 숨겨 살아났다. 이린의 6대 후손이 바로 1392년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다. 그리고 그의 책사로 건국을 돕고 개국 후에는 새나라 조선의 기틀을 세운 이가 바로 삼봉 정도전이다. 정중부 - 이의방 - 이린 - 이성계 - 정도전 - 이방원. 조선이 개국하기 200백년 전에 자칫 조선의 개국이 정중부에 의해 씨앗마져 없어질 수도 있었던 사건이었다.
원나라의 내정간섭과 원나라를 등에 업은 이른바 권문세족이 권력과 재산을 독식하여 국가경영을 제멋대로 자행하던 고려후기. 공민왕처럼 반원자주정책을 펼치면 안간힘을 썼지만 왕의 가지고 있는 힘은 이미 원을 등에 업은 권문세족에게 넘어간 상황이라 공민왕과 몇몇 자주정책을 추진하던 대신들이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하지만 공민왕에 의해 정치무대에 등장한 이른바 신진사대부라는 참신한 개혁세력이 성리학으로 무장하여 점차 힘을 키워나가기 시작했다. 정도전, 정몽주, 조준, 길재, 이색 등 혼란한 고려 후기에 등장하여 고려의 개혁을 줄기차게 주장하였다.
이들 신진 사대부는 다시 두 갈래 갈라지고 만다. 백성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왕조는 더이상 백성을 이끌 능력이 없어 새로운 왕조로 바꾸어야 한다는 정도전, 조준으로 대표되는 역성혁명파와 고려왕조는 그대로 유지하되 개혁을 해야한다는 정몽주, 길재로 대표되는 온건파로 나뉘게 된다. 역성혁명파는 이성계와 같은 신흥무인세력과 손을 잡게되고, 반면 온건파는 권문세족과 어쩔 수 없는 협력관계를 가지게 된다. 결국 위화도 회군으로 촉발된 권력투쟁의 서막은 최영과 정몽주가 역성혁명파에 의해 제거되면서 1392년 7월 이성계가 새로운 왕조의 초대 왕으로 추대되면서 조선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2. 한양천도, 궁궐의 시작
개국과 함께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도읍인 개경을 버리고 새로운 도읍으로 천도를 희망했다. 새로운 도읍을 세우고 천도하는 작업도 순탄치는 않았다. 이성계는 즉의한지 얼마되지 않아 계룡산을 친히 둘러보고 새로운 도읍으로 정하여 공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지대가 너무 좁고 교통이 불편하여 도읍으로 마땅치 않다는 하륜의 주장에 공사를 멈추었다. 결국 한양을 새로운 도읍으로 정하자는 데는 대신들과 이성계가 신임하던 무악대사 사이에 이견이 없었으나, 새 도읍의 주산을 어디에 둘 것인가를 두고 다시 의견이 나뉘고 말았다. 안산을 주산으로 지금의 신촌에 궁궐터를 잡아야 한다는 무악대사와 백악산(지금의 북악산)을 주산으로 궁궐을 세워야 한다는 정도전으로 나뉘고 결국 이성계는 정도전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에 무악대사는 백악산에 도읍이 새워지면 5대 안에 살육이 벌어지고, 200년 안에 온나라가 불타는 전란을 당할 거라는 설이 있지만 이는 후대가 임란이후 민심이 흉흉하던 시대에 구전되어온 이야기가 아닐런지. 역사의 결과를 가지고 어디서 부터 잘못되었는지 그 원죄를 만들려는 풍수에서 기인하지 않았을까. 성리학을 기반으로 일어난 조선의 도읍을 정하는데 이성계가 적잖이 풍수에 의지하였으니 말이다.
1394년 9월 1일 궁궐이 지어지기 시작해 이듬해 9월 29일 완공되었다. 정도전은 궁궐이 준공되고 각 전각마다 이름을 붙었다. 정도전은 시경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토록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 에서 큰 복을 누리라는 뜻의 '경복(景福)'이라는 두 글자를 따서 경복궁으로 이름을 지어올렸고, 정전인 근정정, 사정전, 강령전등에 이름을 붙여 그 의미를 태조와 대신들과 함께 나누었다. 이처럼 새로운 왕조의 기틀로서 등장한 경복궁은 조선의 법궁으로서의 위용과 역할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운명의 수난을 겪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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