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본에 가장 많은 수난을 받은 경복궁 남문, 광화문.
자, 이제 경복궁 안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경복궁을 찾게 되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세종로 거리를 걷거나, 버스를 타거나, 택시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공짜로 볼 수 있는 경복궁 남문, 광화문.
경복궁 창건 당시에는 `午門`으로 부르다가 세종 8년(1426년) 궁의 문과 다리의 이름을 지었는데, 그 때 `光化門`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우선 다른 궁궐 정문들과 건축 양식이 다릅니다. 돈화문이나 홍화문은 나무로 지어져 있는데 반해 광화문은 세 개의 아치형 석문(홍예문이라고 한다)과 석축으로 기단을 쌓고, 그 위에 2층 우진각 지붕과 문루를 올린 형태를 갖추고 있다.
홍예문 천장은 널천장으로 하고, 어간에는 쌍봉(雙鳳)이 보주(寶珠)를 다투며 노는 형상과 운문(雲紋)을 그렸으며, 동문에는 천마(天馬: 기린)가 달리는 모습을, 서문에는 영귀(靈龜)가 바다에 떠 있는 형상을 그려넣었습니다. 이 세 개의 상상의 동물과 용(龍)을 합하여 사령(四靈)이라 합니다. 당연히 임금은 가운데 문으로만 행차를 하지요.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 |
좀 더 관찰력있게 들여다 보면 건축양식 말고 또 다른 걸 발견할 수 있습니다. 광화문 편액 바탕이 흰색인데 반해 다른 궁궐의 정문은 모두 검은 바탕에 흰색으로 쓰여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박정희 휘호로 쓰여졌던 현판도 흰색으로 쓰여졌지요.
대원군에 의해 다시 제 모습을 갖추었지만 그 세월도 오래 가지 못하고 1927년 헐려져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광화문이 있던 자리엔 조선총독부 건물이 들어앉게 되었지요. 옮겨간 자리에서도 온전히 보전치 못하고 한국동란에 석축만 남고 모두 소실되고 말지요.
1968년 남아있던 석축을 지금 서있는 자리로 옮기고 목조가 아닌 철근 콘크리트로 복원 흉내를 냈지요. 현판도 당시 대통령의 한글 휘호로 걸었지요. 게다가 복원할 때 당시 중앙청(조선총독부 건물) 정문에 맞추다 보니 원래의 경복궁 축과 3.5도 틀어지게 되었지요. 차라리 불에 타버린 모습 그대로를 그 자리에 보전하여 후세에게 일제의 야만적 행위와 전쟁의 참상을 웅변하도록 하고, 원래 있었던 자리는 지금처럼 복원하여 놓는 것이 어떨까요??
어차피 복원한 것도 현판이 갈라지니 복원만이 능사는 아닌것 같네요. 포로로마노에 갔을때 고고학자와 발굴단이 부서져 흩어져 있거나 묻혀 있는 조각들이 발견될 때마다 하나하나씩 맞추어 보고, 그 파편들 그대로의 패이고 깨진 모습만 가지고 복원할 수 있는 데 까지만 복원한다고 합니다. 우리 앞에 말쑥한 차림으로 서있는 광화문이 제게는 그다지 정감이 없네요..
2. 육조거리
광화문 앞 넓은 길은 조선시대에도 도시의 중심지였습니다. 지금은 시청까지 길이 바로 뚫려 있지만 원래는 지금의 광화문 사거리에서 남으로는 황토현이라는 나지막한 언덕으로 막혀 있었습니다. 동으로는 운종가로 상가가 형성되어 있었고, 서로는 돈의문으로 이어지는 삼거리였지요.
그리고 광화문 앞에는 동서로 국가의 중추 관서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동쪽에는 의정부, 이조, 한성부, 호조, 기로소가 있었고, 서쪽으로는 예조, 병조, 사헌부, 형조, 공조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양편으로 관서들의 대문이 늘어서 있어서 이 거리는 길이라기보다는 정치, 행정의 중심지로 지금도 정부 종합청사를 비롯해, 외교통상부, 경찰청 등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요.
3. 서울시의 상징, 해치(獬豸)
육조거리에서 광화문으로 들어서려면 양 옆에 해치(해태)가 눈을 부릅뜨고 서 있습니다. 해치는 예로부터 선악을 구별하고 정의를 지키는 전설 속의 동물로 전해내려오고 있습니다. 중국 한나라 때 양부(楊孚)가 지은 <이물지(異物志)>에는 동북 지방의 거친 곳에 사는 해치라는 짐승은 뿔을 하나 가진 동물로, 대단히 영물스럽고 사람의 시비곡직을 가릴 줄 아는 신령스런 재주가 있어, 성군을 도와 현명한 일을 하였고, 만일 잘못한 사람이 있으면 그 뿔로 받아 넘기는 `정의의 동물`이라는 유래를 가지고 있습니다.
광화문 앞의 해치는 고종 때 근대 미술의 대가였던 <이세욱>의 솜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원래 해치는 지금과는 달리, 조선시대의 감찰 기구였던 옛 사헌부 앞에 놓여 있었고, 사헌부 관헌들의 흉배와 관모에 해치의 모양이 장식되어 있었던 것은 이러한 해치의 상징성 때문입이다.
세월이 오래 지나서일까요? 해치 앞발을 자세히 보면 부러져 있는 것을 붙여놓은 것 같아요. 광화문이 옮겨질 때마다 해치도 제자리에 서있지 못하고 옮겨다니는 과정에서 해를 입지 않았는지 궁금해집니다. 그나마 다행히 원래대로 붙여질 정도 밖에 손상을 입지 않은 것지요. 그리고 애당초 있어야 할 감사원 정문으로 옮겨놓아야 하지 않을런지...
4. 홍례문(弘禮門) -> 흥례문(興禮門) -> 조선총독부 -> 종합청사 -> 흥례문
경복궁은 네 개의 커다란 문을 통해서 출입하였습니다. 남으로 조금 전에 보았던 광화문이 있고, 동쪽에는 건춘문, 서쪽에 영추문, 그리고 북쪽에 신무문이 있지요. 다만 지금은 일반인에게 신무문은 개방되어 있지 않습니다.
흥례문은 경복궁의 두번째 문으로 세종 8년(1426년)에 지어졌을 때는 홍례문(弘禮門)이라고 이름이 붙여졌습니다. 고종때 경복궁을 중건했을 때 이름이 흥례문으로 바뀌게 됩니다. 당시 청나라 황제의 이름이 홍력(弘曆)이라 이를 피하기 위하여 이름을 바꾸었다고 합니다. 문 양 옆의 회랑에는 임금을 호위하는 병기와 군사 훈련을 담당하는 관서 즉, 정색, 마색, 결속색 등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지금도 수문장 교대식이나 진법 훈련 시연을 홍례문 앞에서 정기적으로 합니다.
일제는 흥례문에서 유화문, 영제교까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위해 모두 철거하였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조선총독부 건물은 동양에서 제법 규모가 큰 르네상스식 건물이었습니다. 조선총독부 건물은 일제가 무조건 항복하면서 일본 총독이 우리 임시정부 수반이 아닌 미국 하지중장 앞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한 곳이었고, 해방 후에는 정부청사로 쓰여졌지요. 문민정부 들어서 '역사 바로세우기' 일환으로 총독부 건물은 해체되고 그 자리에 지금처럼 옛 궁궐 모습이 복원되어 있습니다.
5. 영제교(永濟橋)을 건너며 몸과 마음을 정제하고
조선시대 궁궐은 정문에서 정전에 이르는 중간에 반드시 조그만 내(川)를 건너게 되어있습니다. 이는 신성한 왕의 공간과 일반 공간을 구분 짓고, 배산임수(背山臨水)의 풍수설에 의해 왕의 공간을 명당(明堂)으로 만들기 위한 장치입니다. 또한 이 물을 건너 왕을 만남에 있어, 사심을 털어 버리고 공명정대한 마음으로 들어가라는 정화의 의미도 함께 담겨 있습니다.
이 내(川)를 금천이라고 합니다. 경복궁의 경우 태종 11년에 북쪽으로부터 인공적으로 물길을 만들어 물을 끌어 들였습니다. 그 위에는 금천교라는 석교(石橋)를 설치하였는데, 다리의 이름은 궁마다 다르게 붙여져 불리고 있습니다. 경복궁에 있는 영제교는 세종 8년에 이름이 지어졌지요. 세종실록(세종 25년 1월11일)에 의하면, 조회시 2품 이상은 영제교 안쪽, 3품 이하는 영제교 밖에 대기하도록 하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다리 양쪽 기둥 위에는 용의 모양을 한 서수(瑞獸)를 설치하여 잡귀나 사악한 무리의 접근을 막았고, 물길 좌우에는 천록(天廘) (혹은 산예(狻猊))이라는 무섭게 생긴 상상의 동물을 두어 물길을 타고 잠입할지도 모르는 잡귀와 사악한 무리들까지 접근을 막아 왕의 공간을 더욱 신성한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다리의 너비는 국왕의 행차 때 행렬의 규모에 맞게 넓게 하였으며, 밑은 홍예의 형태를 취했고 난간은 하엽동자로 장식하였습니다.
금천교에 걸려있는 영제교 | 영제교를 사수하는 서수들 |
6. 기별이 없어 궁금해 죽겠네!
영제교를 건너 근정문으로 향하다 왼편을 보면 유화문이 서있고 빈청으로 연결됩니다. 빈청은 3정승과 정 2품 이상의 고위급 관료가 모여 국사를 논의하는 곳으로 이 일대는 궐내각사가 빼곡히 들어앉아 있었던 장소였지만 아직도 복원이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유화문 북쪽으로 기별청이 붙어있습니다. 기별청은 조보를 발송하는 곳입니다. 조보는 국가가 발행하는 신문의 일종으로 요즘의 관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임금이 내리는 명령이나 지시, 관리의 임명과 면직, 유생이나 관리들이 올리는 소장들이 들어있습니다. 승정원 내에 매일 작성한 조보는 5일분씩 묶어서 발송하게 됩니다. 이렇게 발송된 조보는 일주일 뒤에 지방관리가 받아볼 수 있습니다. 개국 초에는 이를 '기별' 혹은 '기별지'라고 불렀는데 조보가 제 때 당도하지 않으면 '기별이 없다'고 한다고 합니다. 기별지는 세조에 이르러 조보로 불리었고, 구한말 갑오개혁때 지금처럼 '관보'라고 부르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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