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덕수궁 본디 정문을 대신하는 대한문(大漢門)
덕수궁이 궁궐로서 기능과 골격을 잡아 역사에 등장한 시기가 구한말이고 나라가 처한 현실과 주변 열강들 사이에서 저울질을 하는 와중이다 보니 여타 궁궐이 자연지세나 풍수지리에 의존하여 창건된 것과 많은 대조를 이룹니다. 덕수궁은 주변을 두르고 있는 자연지세보다는 주변 열강들의 공관에 둘러싸인 곳에 고종은 궁궐을 짓도록 명하였지요. 조선에게 보다 우호적인 열강의 힘을 빌어야 하는 처지이다 보니 약소국의 어쩔수 없는 선택이지 않았을까요?
덕수궁의 배치는 남향을 하고 있어 당연히 궁궐의 정문도 정전 남쪽에 건립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덕수궁 정문인 인화문(仁化門)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덕수궁 궁장 일부가 다르게 개축되어 있는 곳을 보게 됩니다. 이 곳이 바로 인화문이 있었던 자리입니다. 인화문 앞이 큰 도로에 막혀있어 정문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궁의 동문인 대안문(大安門) 앞은 넓은 도로와 광장이 연해있어 자연스레 대안문으로 정문 역할이 옮겨오게 됩니다. 1904년 덕수궁은 축조된지 얼마되지 않아 대화재로 많은 전각들이 소실되어 이듬해까지 중건과정을 거칩니다. 이 때 대안문은 대한문으로 이름이 바뀌게 됩니다.
현재 정해진 시간마다 제법 근사한 수문장 교대식을 일반에게 선사해주고 있는 대한문 자리는 원래 자리에서 뒤로 물러선 위치입니다. 해방이 되고 근대화에 힘입어 세종로와 이어진 태평로가 서울 도심의 팽창과 늘어나는 교통량으로 도로확장 공사를 하면서 도로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아있을 처지에 놓이자 30여미터 후퇴한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게 됩니다. 2005년 해체후 복원공사 와중에 상량문에 33m 뒤로 물리어져 있다고 적혀있는 것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1970년 공사 당시에 옮겨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대한문은 해방 전에는 독립만세운동의 본거지였습니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하고 장례식이 예정된 3월 1일 많은 백성들이 흰 옷을 입고 대한문에 모여 독립만세를 외쳤지요. 이어 1926년 순종의 인산일(장례날)에 다시 이 곳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후에도 대한문 앞에는 서울광장과 함께 정치 사회적인 사건과 이슈가 있을 때마다 시민사회가 모이는 장소가 되어 왔지요.
대한문 앞 고종황제 장례식 | 대한문 앞에 노무현 조문을 기다리는 시민 |
2. 황제국가을 선포한 원구단과 황궁우
대한문 앞에 서서 조선호텔을 바라보면 현대식 건물에 둘러싸여 있는 전각 하나가 눈에 띄게 됩니다. 2016년 봄 현재 이 전각 마져도 공사용 가림막이 둘러쳐져 있어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보수공사가 마무리되어 곧 우리곁으로 올 예정인데, 바로 원구단과 황궁우가 있었던 자리입니다.
1897년 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그해 10월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이 곳 원구단에서 하늘에 제를 올리고 황제에 오릅니다. 원구단(圓丘壇)은 하늘의 아들인 황제가 하늘에 제를 올리는 제단이고, 제를 올리는 데 필요한 물품을 보관하는 장소인 황궁우(皇穹宇) 가 옆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일제의 탄압과 조선정기의 말살 정책으로 원구단을 훼절시키고 그 자리를 매각하여 호텔 부지로 사용토록 하였습니다. 지금 웨스틴 조선호텔 자리가 바로 원구단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였지요. 지금 남아 보완공사를 하고 있는 것은 황궁우입니다. 황궁우 옆에는 원구단이 있었던 자리라고 알려주는 석고가 자리하고 있으니 한번 찾아보면서 암담하였던 현실을 타개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다했으나 끝내 일제에 무릎꿇고 만 고종의 심경을 헤아려 보면 어떨지요.
원래 모습의 원구단과 황궁우 | 남아있는 황궁우와 석고 |
3. 남아있는 형태가 안스런 금천교와 제자릴 잃어버린 하마비
창덕궁과 창경궁에 있는 금천과 그 위에 놓여있는 금천교를 보고 오신 분은 덕수궁 금천을 무심코 지나칠 수도 있습니다. 명당수가 흐를 수 있도록 금천교 아래에 물길이 길게 나있어야 하는데, 금천교 좌우의 물길이 마치 저수조처럼 막혀있고, 금천교 난간의 조각도 비교적 엉성해 보입니다. 서수가 있어야 할 자이에 대충 깎아올려 놓은 연꽃 봉우이가 처연해 보이기도 하구요. 구한말 궁핍한 재정상황에 의욕마져 바닥으로 떨어져서인가,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해학과 자연스런 조형미를 한껏 발휘해 놓은 창덕궁 금천교에 비하면, 신명을 잃고 마지못해 만들어 놓은 석수쟁이의 심정을 이해해할 수 있을 거 같네요. 더구나 대한문이 뒤로 물러 서는 바람에 이젠 겨우 서너발짝 안쪽에 있으니 금천교라고 해야 할지요.
금천교 앞 왼쪽 모퉁이에는 품계석만한 돌이 서 있습니다. 돌 표면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大小人員皆下馬 -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말에서 내리라.' 태종이 1412년 종묘와 궐문을 지날 때는 존경심의 표시로 탈 것에서 모두 내려서 지나가도록 법으로 정하였습니다. 바로 궁궐과 종묘에 이를 상기시켜주는 하마비입니다. 지금은 덕수궁과 종묘에만 남아 있는데, 덕수궁 하마비는 대한문 안쪽에 서 있습니다. 제대로 역할을 하려면 대한문 밖에 있어야 겠지요.
없는 거보다는 낫다고 생각한 문화재관리 수준이 아닐런지요. 제대로 할거 아니면 차라리 안함만 못하지 않은가요? 로마를 가게되면 콜로세움이 단골 관광코스입니다. 콜로세움은 기원경에 지어진 경기장으로 알려져 있지요. 직접 가보면 외벽의 절반 이상이 허물어져 있습니다. 중세시대 지진으로 일부가 허물어 지자, 시민들이 떨어져 나간 대리석을 가져다 자기들 집을 짓는데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로마시는 허물어져 있는 외벽을 원상으로 복구할 계획이 없다고 합니다. 앞으로도 더 이상 손상이 되지 않도록 관리만 한다고 합니다. 그 옆에 있는 포로로마노는 더욱 더 완전하게 허물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로마가 하고 있는 것은 발굴되어져 나온 유적 조각들을 하나 하나 맞추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짜집듯이 복구하여 나가는 과정을 수십년째 하고 있다고 합니다.
경주를 지나 문무왕 해중릉을 가다보면 감은사터가 있고 위태롭게 서있는 석탑이 두 기 있습니다. 감은사를 절집 중창하듯이 화려한 단청을 덮어 복원하는 것 보다는 지금처럼 기단만 남아있는 빈 터에 처연히 서있는 두 석탑이 한결 제게는 많은 여백을 가져다 주고 있습니다. 갈아없고 다시 복원하거나, 흉내만 내는 유적관리 수준에서 다시 한번 곱씹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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