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주에서 돌아온 선조가 머물 곳이 없어 찾아온 석어당(昔御堂)
중화전을 돌아 뒤로 가면 단청을 하지않은 2층으로된 전각이 나옵니다. 석어당이라 쓰여진 편액이 밖에도 걸려있고, 안에도 있습니다. '옛날 임금의 집'이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선조가 의주에서 돌아와 도성의 모든 궁궐이 소실되어 갈 곳이 없었지요. 그래서 옛 월산대군의 집터에 행궁을 차리고 들어앉게 됩니다. 선조가 16년간 이 곳에서 머물다가 승하하게 되지요.
임진왜란을 겪고나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당쟁에 소용돌이 속에서 선조를 이어 보위에 오른 광해군은 무너져내린 왕권을 복원하기 위하여 궁궐을 다시 세우고, 대동법같은 개혁정책을 실시합니다. 하지만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서인으로 강등시켜 유폐토록 명합니다. 결국 서인들이 주도한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쫒겨나게 됩니다. 서궁, 즉 석어당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 앞에서 죄를 고하는 수모를 당하기까지 합니다. 지금도 묘호를 받지 못하고 광해군으로 남아있는 그에 대한 재평가가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역사는 성공한 자들의 기록인가 봅니다.
2. 폐위된 광해군 가족의 고난
강화도에 유폐된 광해군과 폐세자가 어떻게 목숨을 부지하였는지 관련자료를 읽어보면 참담합니다. 폐세자와 왕비는 얼마되지 않아 화병으로 죽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맙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선조로부터 세자로 책봉되는 지난한 과정에서 인내의 내공이 쌓였나봅니다.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와 서인은 이괄의 난과 병자호란의 정변과 전쟁 중에도 광해군을 이곳 저곳으로 유배지를 바꾸어 혹시 모른 복위의 끈을 없애려 무진 애를 씁니다. 유배의 세월이 길어지면서 광해군을 시중들던 시종에게 비참한 모욕을 당하기 까지 하면서도 인내하다가 결국 예순을 넘긴 나이에 죽게 됩니다. 끝까지 복위의 희망을 놓지않았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광해군을 도울 조정의 신료가 없었나 봅니다.
3. 조선시대 묘호는 어떻게 붙여지는가?
묘호(廟號)란 임금이 죽은 뒤에 종묘에 그 신위를 모실 때 올리는 존호(尊號)입니다. 묘호는 조(祖)와 종(宗) 두 가지를 사용했는데, 이것은 원래 중국의 제도였지요. 삼국시대에는 임금들의 존호를 왕으로 붙여지다가 고려 때부터 중국 당나라가 사용한 묘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삼국시대 왕들의 칭호는 묘호라기보다는 시호(諡號)와 존호의 결합으로 보는 것이 맞지요. 시호는 왕이 죽은 사람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내리는 이름인데, 왕이나 왕비, 종친, 종 2품 이상 관리와 그들의 죽은 아버지나 조상, 공신, 학덕을 남긴 선비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또 존호는 신하들이 왕과 왕비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올리던 이름이지요.
한 예로 세종의 정식 칭호는 <세종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인데, 세종은 묘호이고, 장헌은 중국 명(明)나라 황제가 내려준 시호이며, 영문예무는 신하들이 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올린 존호이며, 인성명효는 조선 왕(제 5대 문종)이 올린 시호입니다. 흔히 세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묘호만을 지칭한 것이며, 장헌대왕이란 것은 명 황제의 권위를 빌리기 위한 호칭인 셈입니다.
묘호는 공조덕종(功祖德宗) 즉, 조(祖)는 나라를 세우는 공을 이룩한 왕에게 붙이고, 덕을 쌓은 왕들의 묘호는 종(宗)을 사용하는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고려 왕들은 태조 왕건을 제외하고 어떤 왕도 조라는 묘호를 받지 않았지요. 그러나 조선에 이르러서는 묘호가 무척 혼란스럽게 되고 말았지요. 세조, 선조, 인조, 영조, 정조, 순조 등에서 처럼 나라를 세우지 않았는데도 조가 붙은 묘호가 여럿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선조, 인조는 외침을 물리치고 나라를 지켰다고 하여 조를 붙였고, 영조부터 순조까지는 고종이 나중에 종에서 조로 바꾸었습니다. 한가지 공통점은 묘호를 조로 추존받은 조선의 임금은 모두 적장자로 왕위를 이어받지 않은 임금이라는 것입니다.
4. 고종이 외국 공사관과 커피를 즐겼던 정관헌
덕홍전 후원인 화계 너머로 조선의 건축양식과 다른 건물이 앉아있습니다. 고종이 덕수궁으로 환궁하면서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에게 의뢰하여 1900년 지어진 서양식 건물인 정관헌입니다. 건물의 형태는 사방이 탁 트인 서양식이지만 곳곳에 전통문양으로 장식을 가미하였지요. 이곳에서 외국 손님을 초대하여 연회를 열거나 다과와 함께 음악감상을 즐기는 휴식공간이었습니다. 아관파천 당시 러시아 공사관에서 처음 커피를 맛 본 고종은 환궁한 이후에도 이곳에서 커피를 즐겨 마셨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커피를 영어발음을 따서 가베라고 부르기도 하고, 서양에서 들여온 탕국이라 하여 양탕국이라고도 불렀다고 합니다.
5. 인조 즉위식이 거행된 즉조당(即祚堂) 그리고 나란히 붙어있는 준명당(浚眀堂)
정관헌에서 내려와 석어당으로 들어가려면 단아하게 이어져 있는 꽃담 사이에 유현문(維賢門)이 들어서 있습니다. 전돌로 홍예를 한 문인데 다른 문하고는 특이하게 나무로 지어지지 않고 전돌로 꾸며져 있습니다. 옆으로 이어져 있는 꽃담과 아주 잘 어울리는 구조입니다. 홍례 옆으로 봉황이 그려져 있고 이 곳을 통과하면 모두가 현명해진다고 합니다.
밖에서 본 유현문 | 안에서 바라본 유현문 |
즉조당은 선조 뒤를 이은 광해군과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의 즉위식이 거행된 곳이면서 선조를 추모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하여 조선 후기 임금 특히 영조는 외침으로 나라가 위기에 빠졌던 교훈을 잊지말자는 의지를 담아 정기적으로 석어당과 이곳 즉조당을 찾았다고 합니다.
즉조당은 러시아 공사관에서 환궁하여 지금의 중화전이 건립되기 전까지 정전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퇴위당한 뒤 몇 년동안은 영친왕의 생모인 귀인 엄씨의 침전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귀인 엄씨는 원래 명성황후를 모시던 상궁이었는데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고종의 후비로 들어오게 됩니다. 고종의 신임을 받으며 영친왕을 낳았지만 일제에 의해 어린 영친왕을 일본으로 보내야 하는 생이별을 겪고 맙니다. 하지만 엄귀비는 인재양성에 뜻을 두고 여성의 신식교육을 위해 여러 학교를 건립하는 노력을 합니다.
즉조당 옆에 대칭구조처럼 나란히 행각으로 연결되어 있는 건물이 준명당입니다. 한자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밝을 명(明)이 이니고 눈밝을 명(眀)으로 쓰여져 있습니다. 당시 물밀듯이 몰려오는 외세에 대해 밝게 보고 올바르게 분별하자는 의미를 담았지요. 이곳에서 고종은 국정을 논의하고 외국사절을 접견하던 곳으로 쓰이다가 나중에 덕혜옹주를 위해 추이나라 최초로 유치원을 만든 곳이기도 합니다. 고종은 덕혜옹주를 위하여 외국 선교사를 선생으로 들이고 함께 공부할 또래 친구들을 불러들였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놀다가 다칠까봐 난간을 설치하였는데 지금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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