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문화유산 이야기/21. 궁궐이야기

[덕수궁] 6. 을사늑약 기록의 현장, 중명전(重眀殿)

학이시습지야 2016. 4. 30.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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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덕수궁에서 분리되어 앉아있는 중명전(重眀殿)

  '광명이 계속이어져 그치지 않는 전각'이라는 뜻을 가진 중명전은 1900년 황실도서관으로 탄생하였읍니다. 러시아 사바틴이 설계한 서양식 2층 전각으로 고종황제가 근대문물 수용에 적극적이었음을 그 자체로 말하고 있습니다. 원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었으나 1904년의 대화재로 덕수궁의 편전과 침전이 소실되어 고종황제가 이 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면서 중명전이란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외교자주권을 일본에게 강탈당한 역사의 현장입니다.

  일제시대를 거쳐 1963년 영친왕과 이방자여사에게 건물이 기증되었으나, 1976년 다시 민간에게 넘어가 정동극장을 거쳐 2006년 문화재청이 인수하여 2010년 복원을 왈료하고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습니다.

  덕수궁에서 이곳을 방문하려면 대한문으로 나와 '덕수궁 돌담길'을 한참 돌아 올라가다보면 안내표지가 서 있습니다. 무심코 가다보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을 정도로 길에서 조금 떨어져 있고, 덕수궁 밖에 서있습니다. 일제가 덕수궁 몇개의 전각을 빼고는 모두 헐거나 민간에 팔아 넘겨서 지금 남아있는 덕수궁의 상당부분의 영역은 민간 건물들이 모두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중명전도 그 영향으로 덕수궁 영역 밖에 혼자서서 고종의 울분을 대신 전하고 있습니다.  


2. 을사늑약이 불법임을 증언하는 중명전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열강들 사이에 체결된 포츠머스협약을 빌미로 조선에 대해 유리한 권한을 행사하기 시작합니다. 집요하게 외교권과 여타의 연안해운 통제권을 강탈하고자 고종과 대신을 설득도 하고 회유도 하던 이토 히로부미는 결국 1905년 11월 18일 새벽, 군대를 동원하여 중명전을 침범합니다. 고종과 대신들을 협박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일제의 보호국으로 삼는다는 을사늑약을 강제한 역사의 현장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고종황제의 어새가 찍혀있지 않고 당시 의정부 회의에 참석한 몇몇 대신의 찬성만 있었지만 일제는 국제조약으로 체결되었다고 국제사회에 공표하지요. 아래 을사오적이 사명한 당시의 '을사늑약문' 사본입니다.





3. 부당하게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한 몸부림.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하여 외교력을 동원하여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회원국자격을 얻게 됩니다. 그 자격으로 국제사법재판소에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제소하여 국제사회가 이를 무효로 받아들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고 소위 '헤이그밀사'를 파견합니다. 하지만 이미 이를 알아차린 일본의 방해와 서구 열강들의 방조로 회의석상에 들어가지도 못하게 됩니다. 사실 헤이그 만국박람회는 '강자들만의 회의' 였던 것입니다.

  이후부터 우리민족은 일제의 만행에 다양한 방법으로 저항하기 시작합니다. 민영환과 조병세는 조약의 부당함을 조정대신으로서 막지못한 책임감에 자결하였고, 을사오적을 처단하겠다는 5적 암살단이 조직되기도 하였습니다. 전국에서 의병이 조직되어 민종식, 최익현 등을 중심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저항운동의 정점은 바로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입니다.  

 

4. 100년이 지난 작금의 현실에 대한 교훈

  탈냉전시대로 넘어오면서 국제사회간에는 영원한 우방도 영원한 적도 없다고 합니다. 소련의 붕괴와 중국의 개혁 개방 정책으로 국제사회의 정치적 영향력과 경제적 힘의 균형이 과거와는 크게 바뀌었습니다. 미국의 목소리가 과거에 비해 약화된 반면, 중국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주변 정세를 조금 눈을 크게 뜨고 들여다 보면 불과 100년전 고종황제가 밤새 고민할 당시와 여러가지 부문에서 비슷해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와 이웃하고 있는 주변국들이 서로 물고 물리는 영토분쟁의 불씨를 하나씩 들고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는 남북이 서로 군사적으로 대치하며 군비 경쟁에 많은 비용을 소진하고 있지요. 북한의 핵무기 개발 억제에 늘 주변 강대국의 눈치나 보고 있고, 일본의 과거 만행에 대한 뻣뻣한 행동에 대해 미국 눈치를 보느라 제대로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앓고 있습니다. 

  미국이 우리의 우방이긴 하지만 냉정히 미국 입장에서는 우리보다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이 훨씬 더 유용한 파트너로 보고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은 군사 비밀정보 교환을 위한 핫라인을 가진다고 작년에 상호조약으로 맺었지만, 우리는 그 수준까지 가지고 못하고 주둔비 분담만 왕창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지요.

  이제는 미국을 향한 무조건적인 짝사랑을 걷어내고 광해군이 펼치려고 했던 균형외교와 실리외교에 한층 더 지혜로운 해답을 만들어내야 할 때라고 봅니다. 1905년 고종에게 조선을 끝까지 보호하겠다는 약속을 한 태프트는 일본으로 건너가 카스라와 밀약을 맺습니다. 조선은 일본에 넘겨주고, 필리핀을 미국이 가져가는 밀약을 맺죠.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미국 정가에 로비하던 알렌은 고종에게서 받은 로비 자금을 반납하게 된 것도 바로 카스라-태프트 밀약의 영향이 아닐까요? 지금 동남아시아 바다 위애는 중국과 미국의 해양 군사력 시험대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일본 자위대 군사력 강화를 미국은 부채질하고 있지요. 당연히 우리와 중국은 일본의 군사력 증대가 전혀 반가울 수 없구요. 더구나 중국은 우리나라 무역 규모의 30%를 차지하는 인접국입니다. 국제사회는 반드시 국력이 강해야만 살아남는 것일 수 있지만 국민의 힘을 하나로 모아 대항헤 나간다면 이 또한 극복하지 못할 위기는 아니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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