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이 푸르른 5월 연휴를 집에만 눌러 있을 수가 없었다.
지난 2월 중순부터 한양도성을 중심으로 문화유산 해설과정을 매주 일요일 수강하여 지난 1일 마쳤다. 그동안 서울에 있는 5 곳의 궁궐과 종묘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과 각 전각에 얽힌 내용들을 전문 강사로 부터 배웠고, 해설 기법을 가미한 시연도 거쳤다. 이제 그동안 익히고 배운 것을 아내에게 베풀겸(?) 집을 나서 창경궁을 향했다.
대략적인 코스로 창경궁 -> 창덕궁 -> 경복궁 -> 노무현 추모전시장 -> 덕수궁 순을 잡았지만 시간을 조절하여 가 볼 수 있는 곳까지 가기로 하였다. 창경궁에 도착하니 2016년 궁중문화축전 기간이라고 하면서 입장료 무료에 여러가지 행사를 제공하고 있었다. 미리 알았더라면 참여하는 프로그램에 직접 신청하여 축전을 만끽할 수 있었겠구나 싶었다. 내년에 다시 같은 행사가 거행되면 참석해야겠다.
을지로 4가에서 걸어오다보니 잠시 그늘에서 쉬어야 겠기에 금천이 흐르는 위에 걸쳐있는 수각에 자리를 잡았다. 수각에 걸터앉아 있는 아내에게 창경궁이 어떤 연유로 건축되기 되었고, 일제 강점기에 창경원으로 훼손된 아픔까지 설명을 하는데 내 설명이 좀 딱딱하였나보다. 설명 중간중간 추임이 전혀 없다. 간략하고 아내가 흥미로울 내용을 추려서 설명을 이어가야겠다.
창경궁 정문 앞에는 임금이 사시는 신성한 영역을 구분하는 금천이 흐른다. 다른 궁궐도 금천이 만들어져 있지만 유일하게 창경궁은 자연수가 금천을 따라 흐르고 그 위에 옥천교가 놓여져 있어 백성과 소통하는 가교가 되었었다. 영조임금이 군역법을 반대하는 신하들의 의지를 꺾기위하여 직접 옥천교를 건너 창경궁 정문인 홍화문 밖에 나가 백성들의 의견을 몸소 청취하였다고 실록에서 전한다. 4백년이 지난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를 자랑하는 지금도 백성의 고충을 듣기 보다는 수행원을 대동하고 시장을 잠시 들러 언론에 쇼 한번 하고나서 백성과 소통하였다는 시늉보다 훨씬 나아보인다.
옥천교에 난 삼도 중에서 가운데는 오로지 임금만이 다닐 수 있어 문관이 다닐 수 있는 우측 길을 따라 명정문에 들어섰다.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에 타서 잿더미가 된 것을 중건한 광해군의 노력을 처마에 드리워진 부시는 알고 있으려나..명전문과 명정전은 1616년에 중건되어 지금까지 옛 모습 그대로 우리와 마주하고 있다. 여늬 궁궐의 정전보다 소박한 단층구조에 단청은 모두 탈색하였는데도 낡아 보일 정도지만 왠지 정감이 가는 정전이다. 더구나 일제가 명정전 앞에 널다란 조정을 덮고있던 박석을 모두 걷어내고 잔디와 모란을 식재하여 공원으로 훼손되는 것도 힘없이 바라볼 수 밖에 없지 안않던가.. 하긴 정전을 중심으로 3000칸이 넘게 주변을 에워싸고 있던 전각들이 모두 스러지는 아픔을 겪은 명정전의 스린 가슴을 어떻게 어루만져 주어야 할까?
창경원으로 폄훼되어 일제로 부터 해방이 되고나서도 50년이 넘도록 궁궐로서 복권되지 못하고 서울 시민의 유원지 노릇을 감내할 수 밖에 없었던 창경궁의 가슴저린 수모를 늦었지만 우리들이라도 위로의 방문 길을 잦도록 해야하지 않을까.
명정전 옆으로 모로 서있는 임금의 집무공간이라 할 수 있는 편전인, 문정전으로 가려고 하니 축전행사 준비로 접근이 안되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갖힌 바로 그 장소임을 상기 시켜주고 관천대 방면으로 돌아 금천 옆에 절반은 허리를 굽히고 서있는 회화나무로 내려갔다. 문정전 뜨락에서 뒤주에 갖힌 사도세자는 바로 이 회화나무 앞에서 8일만에 승하하였다고 전해진다. 역사적인 비극을 지켜보면서 너무 가슴이 아팠던지 나무가 제대로 서있질 못하고 반쯤 누워 있다. 사도세자는 결국 회화나무 앞에 있는 선인문을 통해 궐밖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외전을 뒤로 하고 창경궁 내전 쪽으로 발길을 재촉하였다. 오늘 못해도 경복궁까지는 가봐야겠다. 내전에 들어서니 제법 축전 분위기가 난다. 영조가 장원급제한 신하들에게 어사주를 내려주던 함인정에는 어사주를 내릴 준비를 하고 있나보다. 교자상이 놓여져 있고 그늘진 곳을 찾은 방문객들이 여럿 앉아있다.
함인정에서 중궁전쪽으로 서있는 경춘전과 환경전에는 옛 궁중의 모습을 재연하고 있는 모델들이 당시의 복식을 갖춰입고 있다. 경춘전은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청나라 및 서양의 선진문물의 우수성을 배우고 돌아와 인조에게 조선도 눈을 크께 뜨고 창나라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청을 올렸다가 두달 만에 독살(?) 승하하신 곳이다. 만약 인조가 청나라에게 당한 삼전도의 굴욕을 냉정하게 판단하여 보다 실리적인 국정방향을 잡았다면 봉림대군(소현세자의 동생이면서 효종)이 아닌 소현세자가 왕위를 이었지않았을까?
경춘전은 또한 한류 드라마의 원조격인 대장금에 등장하는 중종이 장금이에게 진료를 받던 곳이기도 하다. 내의녀 복장을 한 모델들이 일반인과 기념촬영에 응해주는 분위기도 연출한다.
경춘전 옆에 동쪽으로 바라보고 있는 전각은 원래 임금의 침전이었으나 주로 대비나 왕비들의 침전으로 사용되던 환경전이다. 사도세자의 부인인 혜경궁 홍씨가 정조를 탄생한 바로 그 자리다. 정조는 환경전 안에 탄생전이라는 편액까지 내려 걸어두었다고 한다. 오늘은 어느 대비로 분해 앉아있는지 아주 곱게 단장한 대비가 당시의 모습으로 앉아있다. 축전행사에 참가하고 있는 모델들은 궁궐 관계자나 일반인이 아니고 연예계에서 제법 물을 먹어 왔던 사람들인거 같다. 낯이 많이 익은 사람들이 여럿 눈에 뜨인다.
함인정에 앉아 환경전과 경춘전에 담겨있는 역사 속의 이야기를 아내에게 설명해주고 통명전으로 발길을 돌렸다.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 지붕에 월대까지 갖춘 창경궁에서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통명전은 왕비의 침전겸 편전이다. 오늘은 대청 가운데 왕비로 분한 모델이 자수틀을 한쪽에 밀어놓고 왕실 어른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아마도 이곳에서 장희빈 모함으로 폐서인이 되었다가 왕비로 다시 돌아온 인현왕후가 아닐지??
통명전 옆에는 인조가 삼전도의 수모를 겪고 돌아와 자리에 누운 양화당이 나란이 있다. 그 옆으로 후궁들의 처소이자 정조임금과 수빈 박씨(순조의 생모)와 애틋한 사랑은 나눈 영춘헌에는 정조의 학문 사랑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전시회를 열고 있다. 정조의 친칠 서화가 전시되어 있고 , 각 방에는 도자기와 당시 문인들의 여유와 낭만에 취해 볼수 있는 전시품도 관람객이 지나치게 조심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정갈하게 꾸며놓았다.
창경궁을 설명을 마치고 자경당 옛터를 지나 창덕궁으로 건너갔다. 창경궁하고 창덕궁을 담장으로 나뉘어 있고 중간 중간에 드나들수 있는 문이 나있었다고 한다. 두 궁궐을 합쳐서 경복궁 동쪽에 있다고 하여 동궐이라 불리게 되는데 사실 창경궁은 정사를 돌보기 보다는 왕실 어른들의 생활공간이어서 창덕궁에 비해서는 규모나 배치가 좀더 자유로웠다.
창경궁에서 창덕궁으로 넘어오면 궁궐 순례 코스가 약간 꼬인다. 하는 수 없이 헌종과 경빈 김씨의 로맨스 현장이자 조선의 마지막 황실 어른들이 살다가 돌아가신 곳인 낙선재를 첫코스로 잡았다. 정조임금 이후부터 갑자기 왕권이 흔들리기 시작해 결국 안동김씨 세도가 60년을 지속하고 나라의 기강과 국력이 형편없이 쇠잔해간다.
순조임금 시절 영민한 효명세자가 죽은 뒤 얼마 되지 않아 순조마져 승하하자 효명세자의 아들인 헌종이 8살 어린 나이에 보위에 오르게 된다. 어쩔 수 없이 조정은 순조의 비이자 헌종의 할머니인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된다. 첫번째 왕비가 후사를 샹산치 못하고 죽게되자 왕비 간택을 직접하게 해달라고 할머니에게 졸랐다. 하지만 내명부의 일이 아무리 임금이라고 한들 뜻대로 할 수 없는 법. 헌종이 원했던 후보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 왕비로 간택되고 이년이 넘도록 후사를 생산치 못하자, 마침내 헌종은 이 곳에 낙선재를 건립하고 마음에 두었던 처자를 후궁으로 맞이한다. 바로 경빈 김씨다. 헌종은 이곳에서 경빈 김씨가 애틋한 사랑을 나누면 백년해로 하고 싶었는데, 신의 심술인지 경빈 김씨가 후궁으로 들어온 지 이년만에 죽고말아 헌종의 애틋한 사랑은 짧게 끝맺고 만다.
창덕궁에서 단청도 하지않은 아주 소박한 공간이다. 해방이되고 대부분의 왕실 재산이 국가로 귀속되었지만 낙선재 만큼은 남겨두어 조선의 마지막 황실 가족인 순종비였던 순원효황후, 이방자여사, 그리고 고종의 고명딸 덕혜옹주가 여생을 갈무리한 공간이기도 하다.
해가 중천에 있으니 궁궐 마당이 점점 뜨거워지고 한낮을 방불케 한다. 점심을 먹을 시간도 이미 넘긴 터라, 정전인 인정전부터 문정전과 희정당을 간단하게 훑고 지나가다가 흥복헌 앞에 아내를 세웠다.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노 대신들이 참석한 조선의 마지막 어전회의 장소였음을 상기시켜주었다.
궁궐에 만들어진 금천교 중에서 가장 균형미와 조화가 잘 이루어진 평가를 받는 금천교를 배경으로 사진 한 장 남기고 점심을 재촉하러 나왔다. 마침 궁장을 따라 올라가다 보니 원서동(원래는 궁서동이라 해야하지 않나? 창경원 서쪽이 아니고 창덕궁 서쪽이니)에 낚지볶음 집에 자리를 잡았다. 맥주 한 입으로 마른 목을 축이고 이어서 나온 매운 낙지복음 비벼서 배를 채우니 나른해진다.
점심요기를 마치고 경복궁으로 향했다. 창덕궁이 동궐이고 경복궁은 북궐이라고 불렀단다. 두 궁궐 사이에 요즘 서울에서 가장 Hot한 지명인 북촌마을이 있다. 북촌마을로 이어진 언덕길 위에서 창덕궁 옆모습을 보니 우뚝한 인정전 주변에 전각 지붕들이 소란스레 서있는게 보였다. 옆으로 보이는 인정전이 자못 웅장해보인다.
조선의 대표하는 법궁인 경복궁에 들어서니 오늘따라 입장객이 무척 많다. 특히나 중국인 관광객이 거짓말 조금 더 보태면 절반은 넘을 거 같다. 한류바람인지 아니면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해외여행 열풍이 분건지...
법전인 근정전 앞 조정에서는 조선시대 행사가 재연되고 있다. 품계석에 옆으로 대신들이 도열하여 앉아있고, 월대 아래 무대에서는 무희들의 궁중 무용이 펼쳐지고 있다. 대형 스크린에 임금으로 분하고 앉아있는 사람은 티비 드라마에 비중이 작은 조연 자주 나오는 연기자다. 오늘은 임금의 생신날인가보다. 영의정이 임금께 장수를 기원하는 술을 올리는 식이 진행중이다.
다른 궁궐 법전과 달리 근정전 월대는 난간도 있고 난간 사이사이엔 하늘은 지키는 동서남북 사방신과 땅을 지키는 12지신상 각 동물들이 조각되어 앉아있어 가장 위엄있고, 웅장한 법전이라고 아내에게 설명해 줄 분위기가 아니다.
경회루 앞에는 세종임금 시절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창제에 몰두하였던 집현전이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에 대원군에 의해 중건되면서 수정전으로 바뀌었고, 갑오경장시절에 군국기무처가 자리하였었다. 오늘은 궁중문화축전의 일환으로 퓨전 국악공연이 열리고 있다.
경회루를 지나 궁안의 궁인 건천궁으로 아내를 안내하였다. 명성황후가 처참하게 스러져간 그 자리를 아내에게 다른 곳은 몰라도 여긴 보여주고 싶었다. 아직도 대원군과 명성황후 사이에서 벌어졌던 갈등과 그 피해에 대해서 역사적인 평가는 많이 엇갈리고 있지만 황후의 시해 그 자체는 잊지말고 역사적인 교훈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신무문을 나오니 청와대가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군사 훈련장으로 사용되었던 경복궁의 후원영역이었는데, 지금이 나라를 대표하는 자리가 되었다. 하얀 정복에 왠지모른 긴장감이 팽팽하게 감도는 분위기다.
신무문에서 경복궁 서쪽 궁장을 따라 내려가면서 오느 일정을 마무리 하였다. 나의 궁궐 설명이 별로 유익하지 않은 표정이다. 설명하는 컨텐츠도 중요하지만 전달하는 스킬이 더 중요하다는 걸 오늘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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