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문화유산 이야기/22. 서울순례길

[남산한옥마을] 3. 한옥마을 안으로 들어가 봅니다!!

학이시습지야 2016. 9. 28.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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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옥인동 윤씨 가옥 (순정효황후 윤씨 친가)

  순정효황후 윤씨는 조선의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계비로서 13살이 될 때까지 옥인동에 있는 큰아버지 윤덕영의 사가에서 살았다고 하는데요, 사실관계는 좀 더 확인이 필요합니다. 아버지 윤택영도 한성 도처에 대궐같은 집을 여러채 가지고 있었는데 굳이 이 곳에 살았다고 볼 수 있는 정황이 없지요. 아시는 것처럼 윤덕영, 윤택영 형제는 친일 행위로 많은 지탄을 받고 있는 인물들입니다. 일제의 강제병합을 위해 순종의 옥새가 필요했는데, 윤황후 치마에 감춘 것을 강제로 빼았아 합의서에 서명토록 한 공로로 일제로 부터 작위도 받고, 은사금도 받았지요.

  

  옥인동 원래 터대로 땅의 높낮이 차이까지 일부나마 되살려 본래 분위기를 재현하였습니다. 제법 규모가 큰 ‘ᄆ자형’ 안채에 사랑채 구실을 하는 마루방과 대문간이 더해져 전체 배치는 'ᄆ자형'을 이루지만 아무래도 안채를 위주로 짠 공감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간소하게 민도리집을 채택하였으나 안채 앞쪽은 일반 민가에서는 보기 드물게 기둥머리에 익공(翼工)을 치장하는 등 건축구조와 세부기법은 당시 최상류층 주택 면모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채에 들어서 있는 대청마루에서는 차를 마시며 한옥의 운치를 몸소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제공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가옥의 형태는 기후와 환경에 따라 지역별로 달리하지요. 남부지방은 덥고 습한 날씨로 인해 통풍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ㅡ자형에 마루를 넓게 하고 창문을 많이 내었습니다. 북부지방은 길고 추운 겨울을 나기위해 바람이 통하지 않는 ㅁ자형입니다. 방과 방을 연결하여 서로 통하도록 하였으나, 복도나 마루가 없습니다. 부뚜막에 방바닥을 이어만든 정주간에는 네개의 인접된 온돌방을 붙여놓아 열 손실을 최소화하였습니다. 중부지방은 남부와 북부지방의 집 형태를 절충한 ㄱ자형을 가지고 있지요.


2.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한 한옥의 비밀

  사계절이 있는 우리나라 기후에 따라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춥지요. 이를 적절히 보완하기 위해 한옥을 지을 때 여러가지 건축요소를 반영하여 이를 슬기롭게 대비하였습니다.

 

  우선 처마의 길이입니다. 하지에는 해가 가장 높이 올라가고, 동지에는 가장 낮게 내려오는 자연이치에 기후적인 영향을 고려하여 처마 길이가 정해졌습니다. 여름에는 직사광선을 막아주고, 겨울에는 햇살이 방안 깊숙히 들어올 수 있도록 하여 더위와 추위를 자연광으로 다소나마 해결할 수 있는 구조이지요.      


  더불어 통풍을 위해 창을 내고 문살과 한지를 더해놓았습니다. 이렇게 하면, 환기와 간접광이 방안으로 스며들어 밝기를 더해주지요. 여름날에 시원한 바람이 대청마루를 훑어서 뜨겁게 달궈진 마당으로 흡수토록 하는 자연적인 공기대류로 냉방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집을 받치고 있는 기단은 마당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막아주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겨울철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세계에서 유일하게 난방과 취사를 동시에 해결하는 온돌이 있지요. 온돌은 고대부터 있었지만 18세기들어 널리 일반화가 되기 전에는 방안의 일부만 덮히는 쪽구들 형태였습니다. 부뚜막에서 취사를 위해 불을 짚히면 음식도 조리하고 구들을 통해 자연스레 난방이 되고 여기서 발생된 연기는 굴뚝으로 빠져나가지요.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연기에는 열기가 없어 불에 타기 쉬운 나무를 이용하기도 하였습니다. 통나무를 쪼개어 안을 파내고 다시 묶어서 사용하였는데 이를 구새라고 불렀습니다. 구들 윗목에는 불길을 쉽게 빨아들이고 연기가 머물러 있도록 고랑을 깊게 파놓았습니다. 이를 개자리라고 부르는데 열효율을 높이는 방편이 되기도 하지요.    


3.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

  이 집은 제기동에 있던 것을 이전, 복원하였습니다. 조선 순종의 장인 해풍부원군 윤택영이 그의 딸이 계비로 책봉(1906)되어 창덕궁에 들어갈 때 지은 집으로 전해지는데, 순종은 처갓집 제사에 불편함이 없도록 경운궁을 헐 때 나온 부재를 가져다 짓도록하였다고 합니다.

  이 집의 평면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元(원)'자 모양인데 제일 윗 터에 사당을 배치하고 그 아래 터에는 몸채를 두었습니다. 안채와 사랑채가 한 건물로 이어져 ㅡ자형을 이루고 그 앞에 동서로 행랑채가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당은 1960년 4·19혁명 때 불에 타서 없어졌던 것을 복원하였다네요.

  윤택영은 스스로 축적한 재산에 더해 일제로 부터 작위도 받고, 은사금도 받아 엄청난 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씀씀이가 너무 헤퍼 도성 안에서 이름난 빗쟁이로 알려졌지요. 결국 빚에 못이겨 파산하고 일제로 부터 작위마져 빼았기자 중국으로 도망가 그 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고 하네요. 

 

  집을 지을 때 가장 먼저 사당이 어디에 들어설 것인지를 정한 뒤에 집의 구조와 배치를 정하는 조상숭배의 가르침이 배어있지요. 또한 유교 사상이 깊어 집 구조도 남녀유별토록 구조를 만들었지요. 남성의 공간인 사랑채와 여자들의 공간인 안채는 내외담으로 구별하였고, 장유유서에 따라 집안의 어른부터 거처할 곳이 정해졌습니다.  


4. 한옥에는 마루도 참 여러가지!!

  마루는 바닥이 지면으로부터 떨어져 있어서 그 밑으로 통풍이 가능하고 외벽의 일부가 개방되어 있거나 개폐가 쉬운 공간을 말하지요. 마루는 모양에 따라 장마루와 우물마루로 나뉘고, 사용과 기능에 따라 대청·마루방·쪽마루·툇마루·누마루 등으로 분류됩니다.


  대청마루는 구들과 구들을 연결하는 큰 마루로 방과 방 사이에 있으면서 천정은 지붕아래 서까래를 그대로 노출시켜 높고 시원하게 열려 있습니다. 그늘진 뒷바당에서 올라온 시원한 공기가 마사토로가 덮여있는 앞마당의 뜨거워진 대기로 흐르면서 대청에는 서늘한 느낌을 줍니다. 마루 밑이 그늘이 져서 서늘한 기운은 마루바닥을 차갑게 하여, 여름철 가족들이 생활하는 주무대가 됩니다. 이 곳 대청과 마당에서 집안의 혼례나 제사가 치뤄지지요   

  누마루는 누각형식의 마루로 습기를 피하고, 통풍이 잘되도록 만들어졌는데, 일반적으로 사랑채 가장자리에 위치해 있어 책을 읽고 휴식을 하는 공간으로 활용됩니다.

  툇마루와 쪽마루는 방과 방을 연결하거나 방 혹은 대청에서 마당쪽으로 만든 마루로 툇기둥이 있으면 툇마루, 없으면 쪽마루가 됩니다.  

  들마루는 잔치를 위해 떼었다 붙였다하며 옯겨서 활용하기 위해 만든 요즘의 평상을 말하지요.  


5. 관훈동 민씨 가옥

  이 집은 민영휘의 저택 가운데 일부였습니다. 그는 관훈동 일대 너른 땅에다 집을 여러채 짓고 일가붙이와 함께 살았는데, 옛 터의 위치는 종로구 관훈동 30-1번지였습니다. 원래 집터에는 안채와 사랑채 외에도 별당채와 대문간채, 행랑채 같은 집채가 있었다고 전하나 나중에 소유자가 바뀌면서 안채와 여기에 연결된 중문간채만 남기고 모두 헐려졌습니다. 1998년 남아있던 안채를 옮겨 지으면서 철거되었던 건넌 방 쪽을 되살렸고, 사랑채와 별당채를 새로 지었습니다. 전체 배치는 사랑채 뒤로 안채와 별당채를 구성하였으며 담과 문으로 적절하게 공간을 나눴습니다.

  민영휘는 명성왕후 등장과 함께 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쳤지요. 일제에 병합되는 과정에서 여러 단체를 조직하여 협력한 대가로 작위를 받고 또한 한일은행을 세워 스스로 부를 불려나가 서울의 팔대가 중 하나로 꼽히는 거부입니다. 아직도 그가 축적한 부를 후손들이 누리고 있다고 하네요. 


  전통한옥은 대개 사랑채, 안채, 행랑채 그리고 별채로 나뉘어집니다.

  사랑채는 집안의 어른인 아버지가 쓰는 공간으로 사람들이 드나들기 좋은 자리에 지어집니다. 아울러 조상을 모신 사당과도 가까이에 있지요. 관훈동 민씨 가옥은 안채와 내외담으로 구별되어 있고, 누마루에는 편히 쉴 수 있는 평상도 설치되어 있습니다.

  안채는 여인들이 기거하는 공간으로서 사방이 막혀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유교에서는 여자가 자유롭게 외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에 집 구조도 집안에서 나오기 어렵고, 집 밖에서 들어가기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청과 마당에서는 집안의 큰 일을 치르기에 넉넉한 대청과 마당을 가지고 있지요. 민씨 가옥 안채에서는 일반인이 예약을 하면 전통 혼례를 치를 수 있게끔 시설과 준비를 지원해주고 있지요.

 행랑채는 대문 옆에 담을 대신하여 지어놓은 집채로, 하인들이 묵거나 가마들을 보관하는 창고 혹은 마굿간이 들어서 있습니다.

 별채는 결혼하지 않은 딸들이 기거하는 공간으로 안채 뒤를 돌아가면 만날 수 있습니다.


  사랑채와 안채를 들여다 보면 방들이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하지만 집안에 큰 행사가 있으면 방과 방사이, 혹은 방과 대청 사이 문을 터서 넓게 만들었습니다. 장지문가 분합문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문을 이용하였지요.

  장지문은 미닫이 형태가 일반적인 데 평소에는 방과 방 사이를 가르는 칸막이 문을 말합니다. 이에 비해 분합문은 두쪽으로 되었거나 4쪽으로 된 문(사분합문)을 접어서 열거나 들어올려 여는 문을 말하지요.


 6. 도편수 이승업 가옥 

  이 가옥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에 의하여 경복궁이 중건될 당시 도편수(목수의 우두머리)였던 이승업이 1860년대 지은 집으로 중구 삼각동 32-6번지에 있던 것을 이곳 남산골한옥마을에 이전, 복원하였습니다. 대문간채와 행랑채가 안채와 사랑채를 둘러싸고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만 남아 있습니다. 안채는 '丁(정)'자형이고 사랑채는 'ᄂ'자형의 평면입니다.


  남산 한옥마을에 복원된 집들을 들어가려면 담장 위로 마치 솟구쳐 서있는 모습을 한 대문을 지나게 됩니다. 이를 솟을대문이라고 합니다. 종2품 이상의 벼슬을 가진 관료들은 가마를 타고 궁을 왕래합니다. 이들이 집안으로 들어오려면 어깨높이 밖에 안되는 담장 크기의 대문으로는 가마가 통과할 수 없지요. 그래서 대문지붕을 높이 올렸지요. 일반 양민들은 담장 높이로 이어서 낸 평대문을 달았습니다. 

  제주도에는 전통적으로 대문 대신 정랑이라는 장대를 대문 대신 가로질러 놓았습니다. 하나가 걸쳐져 있으면 곧 돌아온다는 의사표시로, 둘이 걸쳐져 있으면 오늘 중으로 온다는 뜻, 세 개가 모두 걸쳐져 있으면 당분간 집에 없을 거라는 신호입니다.


7. 오위장 김춘영가옥

  한옥마을 맨 위에 복원된 이 가옥은 조선말기 오위장을 지낸 김춘영이 1890년대 지은 집입니다. 종로구 삼청동에 있던 것을 이전, 복원하였습니다. 'ᄃ'자형 안채에 'ᅳ'자형 사랑채를 연결시켜 ('ᄃ') 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으며, 판대공(板臺工)을 사용하고 홑처마로 꾸미는 등 전체적으로 평민주택의 양식을 보이고 있지만, 안방의 뒤쪽 벽, 즉 길가에 면한 부분에 사괴석(四塊石)과 전돌(塼石)을 사용하여 화방벽(火防壁)을 쌓아 집의 격조를 더 높인 것이 특징입니다.

  조선말기에 소위 집을 지어서 파는 '집장사가 지은 집'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집안으로 들어가는 문이 두 개가 나 있는 데 사랑채로 들어가는 문은 솟을대문 흉내를 낸 것처럼 다른 집 대문에 비해 아주 왜소해보입니다.

  오위장은 종2품 벼슬로 요즘으로 치면 차관이나 청와대 비서관으로 꽤 높은 직급입니다. 하지만 집안에 살림살이, 집 구조와 크기를 보면 고개가 갸우뚱해질 정도로 검소하고 소박합니다.   


  안채 옆 양지바른 곳에는 장독대가 있고, 주심포같이 배가 불룩한 항아리들이 저마다 품고 있는 것을 자랑하며 서 있네요. 전통적으로 발효음식이 주를 이루는 우리의 섭생영향으로 장독대는 집안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지요. 장독대는 주로 우물가 옆 볕이 잘드는 곳에 마련합니다.

  항아리는 위와 아래가 좁고 가운데가 불룩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양은 항아리 안에 온도가 골고루 퍼지도록 합니다. 불룩한 윗부분은 햇볕을 받고 아래부분은 땅에서 올라오는 복사열로 덮여지는 데다 항아리 안이 원형이어서 열 순환을 원할하게 하지요. 항아리 내부가 일정한 온도를 유지하면 정성껏 담근 장이 맛지게 익어가겠지요.

  안채는 대청마루와 부엌 사이에 있는데 방안에 있는 살림도구도 그다지 넉넉해 보이지 않네요. 일반적으로 옛날 한옥에는 요즘과 요즘과 다른 세간살이가 있습니다.

  장롱과 반닫이, 횟대, 등잔, 시렁, 소반 등이 주로 안방에 구비되어 있습니다. 요즘짓는 아파트는 붙박이장이 기본으로 제공되는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장롱이 기본 혼수품이었지요.

  장롱은 장과 농을 합쳐놓은 합성어로, 원래 여러 층으로 제작되었는데 위짝과 아래짝이 따로 분리가 되면 농이고, 붙어있으면 장이라고 부르지요. 놀부가 흥부 집에서 얻어 등에 지고가다 이름을 까먹은 것이 화초장인데 분리가 되니 농이겠지요.

  반닫이는 윗부분은 두꺼운 판자로 덮여있어 그 위에 이불이나 베개, 요 등을 얹저두고 앞쪽으로 난 문으로 안에 서적이나 그릇, 옷가지 등을 보관하는 가구를 말합니다.

  횟대는 요즘 방안에 세워두는 옷걸이처럼 자주 입는 옷이나 도포, 두루마기를 걸어두는데 이용됩니다. 먼지가 내려앉거나 옷이 상하지 않게 수를 놓은 넓은 천을 씌워 두었지요.    

  시렁은 방안 벽에 장대 두 개를 사람 높이 만하게 가로질러 놓아 선반처럼 사용하였습니다. 그 위에 대나무로 만든 바구니나 소쿠리에 물건을 담아 보관하였지요.

  소반은 어른들이 받는 독상처럼 작은 상을 말합니다. 부엌에서 안방으로 음식을 나르거나 집안 어른에게 독상을 올릴 때 사용하였습니다.  


  부엌을 들여다보면 살림도구가 또 있지요. 주로 그릇을 넣어 보관하는 찬장이 있고, 먹고 남은 음식이나 그릇을 얹어두는 긴 탁자 모양의 찬탁이 있습니다. 찬장과 찬탁은 주로 찬방마루에 두고, 설겆이를 마친 그릇따위를 올려놓는 살강은 부엌 벽에 결쳐놓았지요. 서민들은 찬장이 없을 경우 살강에다 먹고 남은 음식이며 그릇을 올려놓고 생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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