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문화유산 이야기/22. 서울순례길

[서울역사박물관] 3. 서울의 변천사

학이시습지야 2016. 9. 26.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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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항과 함께 들이닥친 서구문물

  1876년 조선과 일본사이에 맺어진 강화도 조약을 시발로 조선은 본격적으로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게 되지요. 신문물 도입을 둘러싼 내부 갈등이 있었으나 조정은 반대 세력을 누르면서 미국, 러시아, 양국, 독일 등 서구 열강들과 통상조약을 맺고 문호를 개방합니다. 고종은 舊本新參 기치를 내세워 선진열강에 유학생과 통신사 및 사절단을 파견하여 서구문물 도입에 열정을 보입니다.

  

  서구 열강과 상호간에 국교를 맺으면서 당연히 열강의 영사관이 개설되고, 이들 나라에서 들어온 외국인이 체류할 거류지가 늘어나게 됩니다. 열강들이 덕수궁 인근 정동에 자국의 영사관을 다투어 건립하면서 서울의 새로운 중심지로 부상하게 됩니다. 이들 영사관이 서양식 건축 양식을 채택하여 신식 건물을 정동 일대에 짓자 자연스레 그 주변으로 해외에서 들어온 선교사, 의사 들이 교회와 학교를 세웠지요. 이제 정동은 정치 외교의 중심무대가 되었지요

  하지만 종로는 또 다른 모습으로 바뀌지요. 전기가 도입되면서 대로를 따라 전신주가 들어서고, 전차가 운행되기 시작합니다. 그와 함께 종로대에도 서양식 상업 건물이 늘어나기 시작해 운종가의 모습이 근대적인 상업지역으로 변모하지요.


2. 대한제국 13년의 꿈과 좌절 

1895년 을미사변으로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합니다. 러시아 공사관에 은거하면서 경운궁에 대한 중수할 것을 지시합니다. 1897년 경운궁으로 환궁한 고종은 스스로 황제에 올라 청나라의 속박에서 벗어나 서구 열강과 동등한 지위를 갖게되는 대한제국을 선포합니다. 경운궁 맞은 편, 소공동에 환구단을 새워 이곳에서 즉위식을 갖지요. 동시에 광무개혁을 통해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펼쳐나갑니다. 전화와 전기를 도입하고, 전차와 철도를 개설합니다. 

  또한 서구 열강에 대한제국이 존재함을 알리고 선진문물과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정책을 펼치고 있으니 이를 도와달라는 취지에서 사절단을 초빙해 성대한 기념행사를 준비합니다. 1902년 고종황제의 망육순과 즉위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행사였지요. 이를 위해 대대적으로 도로와 통신망을 정비하는 등 기반시설 정비하고 확충합니다. 사열을 위해 처음으로 자동차를 구ㅐ하였지요. 하지만 이 계획은 러일전쟁과 내부에서 발생한 문제로 결국 열리지 못하였지요. 하지만 이로인해 서울이 근대적인 도시로 한단계 변모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서구 열강을 너무 순진하게 믿고 의지하는 사이 일본은 대한제국을 병합하는 데 집요하고 노골적인 조치를 취해나가 결국, 1910년 강제 병합되면서 서울의 모습은 일제에 의해 처참하게 유린되어 갑니다.


3. 일제 강점기를 넘어 인구 천만의 대한민국 중심도시, 서울

  대한제국의 상징인 환구단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허물어 지고 그자리에 호텔이 들어서지요. 경복궁과 창경궁은 우리 역사를 말살하고 유구한 역사와 문화를 기억에서 지워내기 위해 파괴시켜 나갑니다. 창경궁은 일개 공원으로 전락시켜버리고, 근정전 앞에 있던 전각들을 허물어 버리고 조선총독부 건물을 세웁니다. 남산에는 이토오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박문사라는 신사가 세워지고, 그 옆에 일본 건국신화의 주인공을 모시는 조선신궁을 세웁니다.

  도심 여기저기에는 근대식 건축양식을 딴 방송국, 신문사, 병원, 성당, 학교들이 들어서게 됩니다. 1945년 50여년간의 압제와 탄압에서 벗어난 서울은 수도 서울로서 지위를 가지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이 되어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인구 천만이 넘는 세계적인 도시로 우뚝 서게 됩니다. 

  일제가 무너뜨린 고궁과 유적을 다시 엣모습을 찾아 복원을 해나가고 있고, 일제가 남겨놓은 잔재를 청소하는 노력을 함께 하였지요. 한강의 기적을 세계 만방에 알리는 올림픽을 개최하여 한번 더 세계에 이름을 드높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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