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문화유산 이야기/22. 서울순례길

[남산한옥마을] 1. 남산 한옥마을에 가보세요...

학이시습지야 2016. 9. 26. 17:01
반응형


1. 반골들이 둥지를 틀고 살았던 남산골

  요즘 유커를 비롯한 외국인들을 물론 젊은이들이 사이에서 서울관광 코스 중 가장 Hot한 곳이 계동, 가회동, 원서동, 안국동 일대인 북촌입니다. 북촌은 경복궁과 창경궁 사이에 고풍스런 기와집이 빼곡히 들어선 전통마을이지요. 조선시대 이곳은 이름하여 고위 신료들이 살았던 곳입니다. 조선말기 호적지료에 보면 거주하는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양반이나 관료였다고 합니다.

  이에 비해 목멱산(지금의 남산) 자락아래 회현동과 필동의 남산골에는 하급관리나 권력에서 빗겨 서있는 청렴한 선비들이 살았다고 합니다. 이들은 나랏일에 바른소리(?)를 곧잘 하는 반골이었지만, 가산이 넉넉지 못해 장마 때나 신고 다니는 딸깍발이를 평소에도 소리를 내며 신고다녀 '남산골 딸깍발이'라고 불리기도 하였지요. 

  하지만 비록 벼슬이 없고 가난하였지만, 의롭고 고고한 선비의 기상을 지니고 있어 가끔씩 암행에 나선 임금과 독대를 하며 나랏일에 조언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옛부터 남산골은 청학동이라 불릴만큼 경관이 수려하고 맑은 물이 풍부하여 술과 풍류가 넘쳐났던 곳이었습니다.


2. 남산골에 옮겨지은 다섯 채 한옥..

  서울시는 1998년 '남산골 제모습 찾기'의 하나로 필동에 들어서 있던 국가기관이 서울 외곽으로 이전하고 남겨진 빈 터에 옛 남산골 정취를 되살려 놓았습니다. 서울 곳곳에 흩어져 있던 전통가옥 다섯 채를 남산골로 옮겨 복원하였습니다. 이 곳으로 옮겨진 한옥은 변형이 없는 순수한 전통 가옥을 선정하였습니다. 남산골에는 전통가옥 뿐 만 아니라 연못과 누각을 짓고 계곡 곳곳에 정자를 앉혀놓아 운치있는 남산골을 재현하였습니다.

  다섯 채의 한옥은 옥인동에 남아있던 윤씨가옥, 제기동의 해풍부원군 윤택영 재실, 관훈동의 민씨가옥, 경복궁 중건 당시 도편수였던 이승업가옥 그리고 조선말 오위장이었던 삼청동 김춘영가옥입니다. 각각의 가옥은 형태가 각기 다릅니다. 신분과 재력에 따라 집의 구조와 규모가 저마다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있어 비교하여 감상해 보면 당시의 생활상을 얼핏 그려볼 수 있습니다. 

  1994년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도읍으로 정한 지 600년을 기념하여 지하 15m아래에 당시 서울의 모습과 생활상을 알 수 있는 문물 600점을 선정하여 보신각 종모양의 타임캡슐에 넣어 묻어놓았다고 합니다. 400년이 지난 2394에 개봉한다고 하니 우리 세대에는 볼 수 없겠네요.  

    

3. 한옥이란?

  사실 한옥이라는 말은 없었지요. 그냥 우리나라 집이니까 집이라고 하면 되잖아요? 근대화를 거쳐 서구 문물과 생활양식이 아무런 저항없이 우리 생활에 밀접하게 자리잡았지요. 슬라브 형태의 변형된 서양식 가옥구조가 자리잡더니 이제는 편리하다는 이유로 아파트가 주거의 대세로 자리잡았습니다. 

  하지만 전통 한옥이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우수한 점이 부각되면서 점차 우리의 전통가옥이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서 전통한옥 짓기 동아리와 이를 전문적으로 지어서 공급하는 건축회사까지 생겨났습니다. 이렇게 서양식 가옥과 구분짓기 위하여 한옥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조선시대 가옥 구조처럼 기둥과 대들보로 뼈대를 세우고, 마당을 가지고 있으며, 전통 구들과 황토벽을 갖춘 집을 전통한옥이라고 부릅니다. 조선 말기 급증하는 서울의 인구로 인해 집이 모자라 집을 지어 파는 소위 '집장사 집'을 통상 개량한옥이라고 합니다. 사실 요즘 시골에 전통 한옥을 구조를 가지고 있으면서, 내부구조는 현대식으로 지은 집도 개량한옥이지요. 

  몇년 전 거제도로 여름 휴가를 떠났을 때 펜션에서 묶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 펜션은 창과 생활집기 난방을 제외하곤 전통한옥과 다를 바 없을 정도로 잘 지어진 한옥 펜션이었습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게 방안에서 음식 조리를 못하게 하였습니다. 음식 냄새가 황토벽에 배일까봐, 밖에 지어진 정자에서 음식을 해먹은 적이 있습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