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북촌이 어디인가요?
북촌은 청계천과 종로 윗동네를 이르는 지명입니다. 조선시대 가난하지만 고고한 선비가 살았던 남산골 즉, 남촌은 운종가가 즐비했던 종로 아랫동네인데 반해 북촌은 왕족이나 권세가 있던 사대부들이 모여 살았던 곳입니다. 근래에는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위치한 고급 한옥들이 밀집하여 있는 지역을 말하지요.
북촌지역의 가장 큰 특징은 지형과 물길입니다. 북촌은 남쪽이 낮고, 북쪽으로 갈수록 경사가 심해지면서 네 곳에 골짜기를 품고 있습니다. 물길은 자연스레 계곡을 따라 흐르면서 계곡 옆으로 사람이 다니는 길이 만들어졌지요. 북촌을 안내하는 팸플릿을 보면 남북으로 이어져 있는 네 개의 길이 소개되고 있는데 가회동길, 계동길, 원서동길 그리고 삼청동길이 그것입니다.
한옥의 멋과 분위기 속에 다양한 소품과 먹거리가 이 네 길을 따라 이곳을 즐기러 온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곳에도 여늬 관광코스처럼 북촌 8경을 선정하여 이들의 방문길을 좀 더 쉽고 즐겁게 만들어 줍니다. 지금부터 북촌에 나 있는 길을 따라 북촌 8경과 그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명소를 찾아가 볼까요?
2. 창덕궁 담장으로 따라 가면
창덕궁 왼쪽 담장을 따라 올라가다가 북촌면옥을 끼고 돌아가면 오름길이 나옵니다. 창덕궁 제1길인데 조금 올라가면 돌담 너머로 창덕궁 인정전과 궐내각사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저마다 전각 지붕들이 겹겹이 중첩되어 시야에 들어오는 이 곳이 북촌 제1경인 창덕궁 전경입니다. 다시 내려와 창덕궁 담장길을 따라 막다른 곳까지 걸어가다 보면 기와문양으로 된 담장들이 이어져 있는 곳이 나옵니다. 이곳이 북촌 2경 원서동 공방길입니다.
3. 계동길을 따라....
창덕궁1길을 따라 오르막을 지나 내리막길이 끝날 즈음, 현대 계동사옥에서 올라오는 계동길과 만나게 됩니다. 계동길은 현대사옥에서 중앙고등학교까지 이어집니다. 이 계동길은 독립운동과 관련된 역사적 장소와 근대적 유적들을 품고 있습니다. 게동길과 창덕궁 1길이 만나는 사거리에서 주변을 유심히 살펴보노라면 북촌문화센터 간판을 어렵잖게 찾을 수 있습니다.
북촌문화센터는 북촌에 대한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전통문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문화프로그램을 제공합니다. 2002년 10월에 개관한 이곳은 본래 조선말기 탁지부 재무관을 지낸 민형기의 며느리인 '계동마님' 이규숙이 한성으로 시집와 살던 곳입니다. 전체적으로 안채, 바깥채, 앞 행랑채, 뒷 행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던 것을 서울시가 매입하여 원형에 가깝게 복원하였습니다. 지금은 북촌이 지니고 있는 역사와 가치를 홍보하는 전시관을 비롯해 영상물과 전통체험을 시연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북촌 알림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북촌을 방문하면 제일 먼저 찾아보아야 할 인포메이션 센터지요.
계동길 북쪽으로 걸어올라가면 대동세무고등학교 표지판을 만나게 됩니다. 표지판을 따라 샛길로 발길을 두서너걸음 들여놓으면 왼쪽에 꽤 근사한 집 대문이 보이고 '인촌선생고거'라는 현판이 보입니다. 일반인에게는 내부가 공개되지 않아 그저 대문만 바라보다가 발길을 돌려야 합니다.
이 집은 인촌 김성수가 일본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중앙고등학교를 인수해 운영하기 위하여 구입해 살던 집입니다. 1919년 1월 그가 운영하는 중앙고등학교 숙직실에서 송진우, 현상윤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칠 방책을 꾸민 것이 3.1운동의 단초가 되었지요. 이후 그는 경성방직회사와 동아일보를 세워 물산장려운동과 민족의식 고취애 힘을 쏟았죠. 하지만 이러한 그의 공적도 일제의 탄압이 집요해지면서 점차 일제에 동조하고 나아가 일제의 정책을 찬양, 고무하는 데 앞장서게 됩니다. 해방이 되고 이승만 정권하에서 부통령을 지내다가 1955년 타계하게 됩니다. 그가 세운 고려대학교 교정에 그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다시 계동길로 나와 다음번 오른쪽 골목길로 접어들면 유심당이라는 게스트하우스 나옵니다. 이곳은 만해 한용운선생이 1918년 9월 월간지 '유심'을 창간하여 청년들의 독립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한 거처로 사용하던 곳입니다. 이 집은 일제말기부터 보존된 한국 전통가옥으로 문화재청이 2001년 근대문화유산으로 인정하였지요.
유심당을 보고 나오다 보면 왼편에 하얀색을 두르고 있는 오래된 벽돌 건물과 마주하게 됩니다. 중앙탕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지만 지금은 목욕탕이 아니라 외국 유명 선글라스 전시장으로 바뀌어 있습니다. 안으로 들어가 보면 옛날 목욕탕 구조를 그대로 두고 그 공간을 적절히 활용하여 자사 제품을 전시하는 상당히 아이디어풀한 곳입니다.
이번에는 계동길을 5분 정도 걸어올라가면 오른쪽 길 옆에 돌로 만든 우물이 나타납니다. '석정보름우물'로 불리는데요, 상수도가 없던 시절에는 동네사람들의 식수원이었죠. 갖바치와 양반도령의 전설을 품고 있어서 15일 동안은 물이 맑고 나머지 15일 동안은 흐려진다고 얘기로 보름우물이라 불리었다고 합니다. 이 우물을 가져다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에 궁궐 궁녀들까지 몰래 물을 가져다 마셨다네요. 1874년 청나라에서 온 주문모신부가 이 우물물로 세례를 주었다고 하며 김대건신부가 이 지역에서 사목활동을 할 때 성수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이런 연유로 천주교 박해 당시 많은 순교자가 발생하자 이 샘의 물맛이 써져서 한동안 식수로 쓸 수 없었다고 합니다.
계동길은 중앙고등학교 정문에서 끝나게 됩니다. 중앙고등학교는 1908년 기호지방의 우국지사들이 만든 기호흥학회가 기호학교라는 이름으로 설립하였습니다. 이듬해 9월엔 흥사단에서 설립한 융희학교를 흡수합니다. 당초 우국지사들이 세운 호남학회, 교남학회, 관동학회 등이 운영난에 봉착하자, 기호흥학회가 이들을 모두 흡수하여 중앙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학교명도 중앙학교로 개명하였지요. 하지만 중앙학회도 재정난을 이기지 못하고 1915년 김성수에게 넘겨지게 됩니다. 김성수는 건학이념을 위해 민족정신이 투철한 송진우, 현상윤, 최두선등을 교사로 초빙하고, 1917년 지금의 위치에 학교 건물을 신축합니다.
1981년 이 학교 본관, 서관, 동관등이 각각 사적지로 지정되었습니다. 1905년 미국인 선교사에 의해 소개된 야구가 1910년 중앙학교가 중심이 되어 학교대항 야구대회로 확대되면서 본격적으로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게 되었지요.
4. 북촌 8경이 모여있는 가회동길
중앙고등학교 정문에서 서쪽으로 방향을 잡아 가다가 북촌로 12길을 따라 내려가면 전통문화를 소재로 한 개인박물관들이 나타납니다. 매듭공방, 자수박물관과 가회박물관으로 이어지는 이 길이 북촌 3경 가회동 박물관 길입니다.
작은 골목길을 벗어나오면 제법 큰길과 만나게 됩니다. 도로명은 북촌길인데 일명 가회동길로 통하지요. 횡단보도를 건너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조금 올라가면 한옥으로 멋스럽게 지어진 성당이 우리를 반겨줍니다. 성당 건축양식과 한옥의 조화가 제대로 어우러진 가회동성당입니다.
가회동성당은 1775년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주문모신부가 집전한 미사가 봉헌된 곳이자 박해가 시작된 지역에 지어진 성당입니다. 또한 1955년 우리나라의 마지막 황실인 의친왕 이 강과 왕비인 김숙이 세례를 받은 역사적인 이미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성당으로 올라가면 한옥양식 건물이 나오는데, 전국을 다니면서 어렵게 얻은 춘양목이라는 적송을 재료로 하고, 각 분야의 무형문화재 기능보유자를 초빙하여 '대표 작품'으로 불릴만한 한옥을 지어달라고 부탁으로 그 모습을 얻게 되었지요.
건물은 대청마루와 누마루 쪽마루로 되어 있으며 특히 쪽마루는 외부에서 온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게 했고, 누마루는 삼삼오오 모여서 차를 나누며 담소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마련하였습니다. 본당에 붙어있는 종루에는 1958년 독일에서 최고의 주물기술로 제작된 종이 걸려있는 데 작은 두드림으로도 아주 맑고 청아한 소리를 낸다고 합니다.
가회동 성당에서 잠시 휴식을 가진 후 가회동길을 따라 아래로 조금 내려오면 사거리에 돈미약국이 있습니다. 예전에는 약국이나 약방 그자체가 상호였는데, 돈미약국이 전국에서 처음으로 약국이름을 내걸고 사업을 시작하였다고 합니다. 이 약국의 명성은 마을버스 정류장 이름으로 사용될 정도입니다.
돈미약국을 끼고 다시 좁은 골목길을 따라 제법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면 가회동의 ㅁ자 한옥들이 촘촘히 채워져 있는 모습을 내려다 볼 수 있는 길이 나타납니다. 내려다 보이는 집들은 구한말부터 팔기위해 지어진 이른바 '집장사 집'들입니다. 북동쪽에 보이는 언덕에는 프랑스식 양옥이 우뚝 솟아 있는데요, 1930년대에 지어진 집으로 주인인 이준구는 주변이 모두 한옥이라 차별을 주고 싶었나 봅니다.
올라간 계단 언덕길을 다시 돌아내려와 북촌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가회동 골목길로 가봅니다. 이 길은 좁게 난길 양 옆으로 제법 잘 지어진 한옥이 어깨를 마주하고 빼곡히 이어져있습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것이 북촌 5경 가회동골목 오름길이요, 위에서 아래로 내려보면 북촌 6경 가회동골목 내림길입니다.
위로 올라가다 보면 집 대문에 인형처럼 생긴 조각이 매달려 있고, '꼭두랑 한옥'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이 집은 꼭두를 모티브로 다양한 예술품과 기념품을 전시해 판매하고 있습니다.
꼭두는 나무로 만들어져 상여를 장식하는 부속물입니다. 사람의 모습은 물론 동물 형상을 하고 있으며 목우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우리가 동물이나 사람 형상을 하고 있는 소품을 인형이라고 부르는데 이는 일본에서 온 어원으로 사람모습을 한 형상만 지칭할 수 있어 전부를 포괄하는 어휘로는 부적절하지요.
꼭두는 원래 상여에 장식되어 망자가 저승으로 가는 길을 동행하며 불안을 달래주고 슬픔을 위로하는 역할을 합니다. 꼭두의 종류도 다양해서 인물상을 한 꼭두는 낯설고 험한 길을 가는 이에게 등불을 밝혀 길을 안내 하기도 하고, 무서운 표정을 지어 가는 도중에 주위로 부터 받을 수 있는 나쁜 기운을 물리쳐 주는 역할도 합니다. 또한 여행자의 시중을 도와 거추장스런 허드렛 일을 맡기도 하고, 악기를 연주하며 저승길로 가는 길에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합니다.
봉황모양의 꼭두는 상여 네 귀퉁이를 장식하는데, 초월과 비상을 상징하여 망자가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데 힘을 보태줍니다. 용무늬 꼭두는 상여 앞과 뒤에 판자형태로 붙여져 있으며 황룡과 청롱이 수평으로 나란히 얽혀 있기도 하고, 수직으로 서로 얽켜서 올라가는 형상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꼭두를 보고 오름길을 재촉하여 북촌 6경을 내려다 보고 오른쪽으로 길을 잡아 조금 가면 한옥들의 처마와 담장들 사이로 난 좁은 길에 멀리 남산까지 시야가 작은 캔버스에 그림처럼 들어오는 곳이 나타납니다. 이곳이 북촌 7경 가회동 31번지입니다. 자칫 지나칠 수 있으니 꼼꼼하게 살펴야 북촌을 맛을 눈에 담을 수 있습니다.
북촌 7경에서 북쪽 방향으로 조금 걸어올라가면 고불 맹사성 집터를 만나게 됩니다. 지금은 동양문화박물관을 세워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를 배우고 체험하는 현장 학습장이면서 우리의 전통차를 마실 수 있는 다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박물관 앞에 서면 경복궁과 저 멀리 인왕산이 고즈넉이 내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집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궁에서 퇴궐하여 소 잔등 위에 올라타 피리를 불며 올라오는 청백리 맹사성을 머리에 그려보면 어떨까요?
이제 북촌 8경 삼청동 돌층계길로 내려가 오늘의 북촌기행을 마무리합니다. 이 돌층계길은 북촌 마을에서 삼청동길로 내려가는 돌계단인데 돌을 쪼아 계단을 만들었습니다. 좁고 가파른 계단 옆에는 주민들이 가꾸어 놓은 예쁜 꽃들이 있어 오늘 하루 힘들었던 피로를 말끔히 없애주네요. 다음엔 이곳에서 시작해 거꾸로 돌아보는 북촌 기행을 예약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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