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문에서 시작하는 성곽길을 버리고 성북동길로 내려서 천천히 걸어갔다. 최순우 옛집을 찾아가기 위해서다.
아내에게 미리 설명을 하지않고 집에 들어섰다. 남산골에 있는 제법 규모가 큰 대갓집 수준과는 거리가 있는 별로 크지않은 ㅁ형의 전통가옥이었다. 아내가 한바퀴 둘러보더니 '여기 사시던 분이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를 쓰신분이네' 한다. 맞다. 최순우선생은 고고미술학자이면서 미술평론가다. 아내가 말한 대표작은 우리의 문화유산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읽어야 하는 필독서이다.
이 집이 도시화의 물결에 휩쓸릴 처지에 놓이자 한국내셔널트러스트라는 NGO들의 자발적인 모금을 통해서 이 가옥을 매입하여 복원작업을 마친뒤 등록문화재로 등재를 마쳤다. 우리가 방문하던날, 조선백자를 재현한 작가의 전시가 있었다. 소박하고 정갈한 집의 모양새와 어울려 방안에 소담스레 전시되어 있는 하얀색 빛을 자랑하는 백자가 방안의 가구와 어울려 가지런한 자태를 보여주고 있었다. 뒷뜰로 들어서니 댓돌들이 어른이 발걸음을 옮길 수 있는 거리에 하나씩 놓여있고 그 중간에 돌바구니가 들어서 있다. 돌바구니 안에는 빗물이 고여있고, 물 표면에 입사귀 두 닢이 그냥 앉아있다. 한참을 툇마루에 앉아서 이 살림집이 방문객에게 건네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를 듣고 싶었다. 우리 조상이 남겨준 유물과 유적이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후손들이 함께 나눠가지게 하기 위하여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서서'를 집필한 저자의 뜻을 어떻게 헤아려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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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을 나와서 지도를 보고 간송미술관으로 향했다. 간송미술관은 일년에 두번만 개방, 전시하는 정보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외관만이라도 보고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찾아보려 했다. 간송 전형필은 근대 3대 부자로 꼽힐 정도로 재산이 많았으나,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빠져나가는 문화재를 사들여 문화주권을 지키려했던, 노블리스 오블리주'를 실천가이다. 수집한 문화재를 보관할 장소로 이 곳에 보화각을 세우고 전시 및 보전활동을 펼쳤다. 1962년 간송이 세상을 뜨고 4년 뒤에 그를 기리기 위하여 간송미술관으로 이름을 바꾸고 오늘에 이르렀다. 간송이 수집한 민속 예술품은 추사 김정희, 겸재 정선,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 등이 남긴 미술품, 서예 작품과 불상, 석불, 서적등으로 한국미술사 연구에 소중한 자료들이다. 정문에는 동대문 역사박물관에 조선미술품이 전시되고 있다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오는 10월에는 아내와 함께 간송미술관에 직접와서 간송이 남기고 간 문화재 관람을 해야겠다.
성북동 입구에 들어서면서 길에 연해 가게와 식당들이 이어져 있는데, 그 모습들이 종로에서 보는 가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가게마다 연륜을 보이기도 하고 어린시절 찾아갔던 모습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메뉴도 향토색이 묻어있거나 추억이 배어나오는 것들이 많다. 우리밀 국시, 왕돈까스, 메밀 수제비, 성북갈비탕등 서민들이 가격 부담없이 고를 수 있는 메뉴를 약간이 허름해 보이는 가게에서 걸어놓고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와 함께 우리밀 국시 하나, 빈대떡 한판으로 배고픔을 갈음하고 길을 나서는데, 왕돈까스집 앞에서 그만 왕돈까스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하나 더 시켜먹었다.
길상사 오르는 길옆에 있는 상허 이태준고택으로 길을 잡았다. 수연산방에 이르니 공사중이라 안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오늘은 공사중인 이화장도 못 들어가고, 수연산방도 댜문만 구경하고 가야할 팔잔가 보다. 이태준은 1930년대 사상적인 이데올로기를 문학에서 배제시킨 순수문학을 표방하여 정지용, 이무영, 이효석등과 함게 작품활동을 하다가 한국전쟁 중에 월복문학가로 알려져있다. 수연산방은 상허의 후손이 찻집으로 운영하며 고택을 유지하고 있다. 공사가 마루리되고 다시 문을 열면 비가 오는 날 이곳에 와서 차 한잔을 마시고 싶어졌다.
이젠 오늘의 마지막 방문지 심우장으로 길을 잡았다. 만해 한용운이 조선총독부로 방향을 두고 세수를 하다보면 그들에게 허리를 굽히게 되는 것조차 스스로에게 용서가 되지않는다 하여 이 곳 성북동에 터를 잡아 집을 지었는데 집터의 방향도 총독부를 등진 동북향을 바라보고 있다. 1933년부터 해방이 되기 직전해, 돌아가실 때까지 이 곳에서 살았다고 한다. 앞면 4칸과 옆면 두칸의 팔작기와집으로 심우장(尋牛莊)이라는 택호는 '자기의 본성인 소를 찾는다'는 불가의 깨닮음에서 따왔다고 한다. 최순우고택과 달리 이곳은 방안으로 들어가 만행의 유품을 직접 볼수 있도록 방문객에게 배려하였다. 만해의 절개와 강직함이 오늘에 와서 많이 퇴색하여 이승만 기념관 만도 못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같았다. 친일의 후손들이 발호하여 이나라의 '자칭 보수'의 기치 아래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으니 일제 치하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가진 재산도 탕진하고, 생명 마져도 초개와 같이 버린 그분들의 영령은 하늘에서 어떤 마음으로 이 나라를 굽어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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