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신문에서 한양순성 18km를 소개하는 특집세션을 접하게 되었다. 시골 촌놈이 서울에 올라온지 10여년이 흘렀는데, 겨우 다녀본 곳이 광화문, 경복궁, 창덕궁, 남산골, 인사동, 남산에다 집 앞에 있는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이 전부인거 같다. 기사를 접하고 이번 봄에는 아내와 함께 한양순성길을 한바퀴 돌아볼 계획을 갖게 되었다.
5월17일 일요일 해가 중천에 걸릴 무렵 집을 나섰다. 한양순성길 4코스 돈의문터에서 창의문 구간을 순례하는 날이다. 가능하면 복장을 가볍게 하느라 둘째아이 책가방용 배낭에 과일 두세개 담아서 출발했다. 8호선 몽촌토성에서 천호역으로 가, 5호선으로 갈아타고 30여분 정도 가니 서대문역에 도착했다. 세월의 탓일까, 전에는 이런류의 여행이나 순례는 운동도 되지않고, 땀도 나지않아 별로 내키지 않고 자전거를 타고 백여키로를 달리거나, 헉헉거리며 산을 오르는데 열중하였는데, 요즈음은 내가 더 가고 싶어 안달하는 모양새다. 새월에는 장사도 없고, 몸을 혹사시키는데 인색해지나 보다.
역을 나와 지도에 있는 대로 종로방향인 강북삼성병원으로 향했다. 적십자병원을 지나자 곧 강북삼성병원이 나오고 정문을 지나자마자 작은 언덕받이 계단으로 오르는데 돈의문터를 표시한 나무 표지가 나타났다. 조선이 건국되고 한성에 궁궐을 축조하면서 궁궐을 드나드는 사대문중 하나였으나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도시계획이라는 미명하에 철거되었다. 조선이 사대문을 축조하고 각 문에 이름을 지어붙였는데, 유교의 덕목인 仁,義,禮,智,信에서 따와 동쪽에는 보물 1호로 지정된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남쪽에는 국보 1호인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숙지문(肅智門, 나중에 숙정문으로 바뀌었다)으로 각각 붙였다.
사대문 중에서 유일하게 그 자취를 잃어버린 돈의문은 이렇게 서있었던 자리에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정부가 돈의문 복원을 게획하고 있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사대문의 이름부터 원래대로 돌려놓는 것이 우선이지않을까? 남대문, 동대문은 아예 우리의 지명이나 유적명에서 영원히 말살하는 과감하고 아쌀한 결정을 하여 우리의 고유 정기를 바로잡는 노력이 우선한다고 본다, 과거사 정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겨레의 미래도 정체성이 모호한 경계에 서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돈의문터에서 송월길로 접어들자마자 경교장 입간판이 서있고, 병원 안에 경교장이 들어있었다. 경교장은 일제 강점기에 광산업으로 축재한 최창학이 1938년에 지은 건물로 1945년 11월 23일 귀국한 김구주석과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이 입주하여 임시정부 국무회의등을 열고, 반탁운동 및 남북현상을 추진하는 근대사의 핵심적인 장소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경교장이 이렇게 초라하게 남의 집 현관으로 모양새로 남아있게 된 것은 바로 김구주석이 1949년 6월 26일 누군가의 사주를 받은(?) 안두희의 총에 서거하였기 때문이다. 김구주석이 서거한 뒤 경교장은 외국 대사관으로 사용되다가 결국 고려병원에 넘어가고 말았다.
병원시설로 편입된 경교장은 김구주석을 기리고 임시정부의 국내 흔적이 남아있는 기념적인 건물로 보존의 목소리가 커져 2001년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뒤 2005년 국가사적으로 승격되었다. 만약 지금의 정부였다면, 국가 사적으로 지정하였을지를 다시한번 되시기면 아찔한 기분이다. 일제에 부역한 프락치들을 정치기반으로 대통령이 된 이승만을 국부로 추앙하지못해 안달난 정부에게 과연 김구주석은 좌파 테러리스트 대장으로밖에 보이질 않지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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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을 들어서니 자원봉사 하시는 분이 건물의 일반적인 내력과 각 공간에 대한 당시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서 차분하게 설명해주었다. 나는 이층으로 빨리 올라가고 싶었다. 안두희의 총에 쓰러진 그 장소를 눈으로 보고 싶었다. 당시 대한민국 육군소위였던 안두희는 현장에서 경비원에게 잡혔으나,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헌병대에 바로 인계되어 군사법정에서 종신형을 받았으나, 석달후 15년형으로 감형되고, 6.25가 발발하자 현역으로 복귀하면서 잔여 형기를 면제받고 휴전과 함께 전역하여 군납공장까지 경영하였다. 육영수를 죽인 혐의로 문세광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는데...당시 우익의 상징인 서북청년단원인 안두희가 쏜 총탄은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호국영령의 심장을 뚫고 지나갔고, 영원히 아물지 않을것 같은 상처로 남아있다. 군사정권시절 안두희의 동생은 연세대총장까지 지내지 않았는가..
경교장을 나와 월암공원으로 향했다. 서울시교육청 뒤에 붙어있는 공원 한켠에 홍난파가 살았던 집이 있다고 하는데 공원 안을 아무리 둘러봐도 찾아낼 수가 없어, 사직터널방면으로 발길을 옮겼다. 나중에 집에와서 지도를 찾아보니 공원이 아니고 송월길 바로 옆에 있었는데, 우리는 공원 안에서 찾다보니 발견을 하지못했다. 사직터널 위로 난 길 부터 성벽길이 시작된다.
한양도성 복원을 본격적으로 하면서 도성의 모습이 여러가지 모습이 혼재되어 있다. 축성 초기의 돌을 깎지않고 쌓아놓은 모습부터 제법 크기를 재단해서 일관되게 쌓은 곳이 있는가 하면, 최근의 복원상태를 알려주듯 아주 깨끗하게 절단되어 축성된 모습까지. 인왕산길과 교차하는 지점부터는 순성길 순례라기보다는 인왕산 등산으로 바뀌었다. 가파른 등산로가 잘 다듬어진 돌로 된 계단길이다.
헉헉거리면 가파른 계단길을 한참 오르니 인왕산 정상이다. 올라오면서 사복을 한 군인들이 경복궁 방향으로 렌즈를 들이대니 득달같이 좇아와 촬영금지 구역이란다. 구글지도로 보면 훤히 다 들여다보이는데 아직도 사진촬영을 막고 있다. 하긴 인왕산 등산을 허용한 것만도 감지덕지다.
인왕산 정상에서부터 창의문까지는 다시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나무로 된 계단길과 돌로 된 길을 중력의 힘을 이용해 내려오다 보니 정말, 금방이다. 성벽길에서 벗어나자 윤동주 문학관이 있는 부암동에 도착했다. 윤동주 문학관에서 해방을 보지 못하고 1944년 꽃다운 나이에 스러져간 그가 새삼 안타까운 마음으로 가슴을 메운다. 창의문을 지나 그냥 내쳐 1코스 백악구간마져 가려고 하였으나 신분증이 없어 다음으로 기약하고 다시 윤동주 시인의 언덕 아래로 내려서니 청운문학도서관이 자리잡고 있다. 고즈넉한 위치에 전통기와를 얹은 고풍스런 건물로 지어진 구립도서관이다. 정년을 맞으면 대중교통으로 여기로 출근해서 하루종일 책도 읽고, 블로그에 읽은 내용을 글로 남기면 되겠구나 싶을 만큼 고요하고 정갈한 도서관이다. 아직은 장서가 넉넉치 않아보여 읽을꺼리가 없으면 서점에서 사와야 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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