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선이 곤룡포를 흔들며 외칩니다, 상위복(上位復)~~
왕의 죽음을 '승하(昇遐)'라고 합니다. 사전적 의미로는 왕이나 존귀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이를 높여 부르는 말이지요. 왕이 승하하신 후 왕릉에 모셔질 때까지 기간을 국장이라고 합니다. 왕이 돌아가실 때가 되면 다음 왕을 지명하는 유언을 남기는 데 이를 고명(顧命)이라고 합니다. 이어서 어의가 코와 윗입술 사이에 새 솜을 놓고 숨이 멎었는지를 살피게 되지요.
왕이 숨을 거두게 되면 내시는 왕이 평소에 입고 있던 곤룡포를 들고 대전 지붕에 올라가 옷을 흔들며,
"상위복(上位復)~~~, 상위복(上位復)~~~, 상위복(上位復)~~~"
하며 떠나가는 왕의 혼을 불러 돌아오라고 외칩니다. 그런 다음 곤룡포를 비롯하여 9겹의 옷을 입혀드립니다.
돌아가신 지 5일째 되는 날에는 시신을 재궁(관, 즉위한 해에 소나무로 만들어 해마다 칠을 합니다)에 안치합니다. 여름날에는 시신이 부패하기 쉽기 때문에 재궁을 얼음이 채워진 빙반에 넣게됩니다. 재궁을 넣어두는 집을 찬궁이라고 부르네요.
재궁에 안치된 다음 날엔 후왕이 정전 문 앞에서 옥새를 받아들고 즉위식을 갖게 됩니다. 이어 7일째 되는 날에 새 국왕은 신하들이 만들어 올린 선왕의 묘호, 능호, 시호를 받아 선왕께 올립니다. 재궁이 안치된 전각을 빈전이라고 부르지요. 승하하신지 5개월째가 되면 재궁을 능으로 모시게 되고, 신주(유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신주를 만들어 돌아가신 분을 모셨다)는 궐 안에 있는 혼전에 모셨다가 27개월이 지나면 종묘로 옮겨지게 됩니다. 왕의 발인은 대여(大輿)라고 부르는 상여를 800명이 4교대로 나누어 능까지 옮긴다고 합니다.
보다 상세한 절차는 맨 아래에 정리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국장 절차는 "국조오례의" 중에서 "흉례'에 자세히 정리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이를 관장하는 기관이 따로 있습니다. 왕이 승하하고 장례를 치르는 업무는 빈전도감에서 맡고, 능의 위치를 잡고 짓는 일은 산릉도감이 관장합니다. 국장에 대한 전체 업무는 국장도감이 총괄하여 필요한 물품을 준비하는데 통상 좌의정이 맡게 됩니다.
2. 선릉을 방문하여 왕릉 구조를 살펴보자...
산릉도감이 주체가 되어 조성된 왕릉은 일반인 묘에 비해 규모와 석물들의 배치에 그 궤를 달리합니다. 우선 왕릉은 크게 세 개의 구역을 나뉘어집니다.
재실에서 제례복으로 갈아입고 금천교를 건너 홍살문까지 이르는 구역을 '진입공간', 홍살문에서 제사를 올리는 정자각(丁字閣)과 예감까지를 '제향공간', 정자각 뒤에 조성된 봉분과 석물이 있는 구역을 '능침공간'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강남에 있는 선정릉에 들어가서 왕릉이 어떻게 조성되어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 재실(齋室)
재실은 왕릉의 수호관리를 담당하던 참봉(參奉)이 상주하던 곳으로 제사에 쓸 향을 보관하고 제기(祭器)를 간수하며 제사와 관련한 전반적인 준비를 하던 곳입니다. 제사가 있을 때 왕이나 제관은 일단 재실에 들어가 잠시 머물면서 옷을 갈아입고 제사에 나서게 되지요.
재실의 가장 중심 건물은 향을 보관하는 향대청이, 그 옆에 제관이 머무는 재실이 있고 제수 장만 등을 주관하는 전사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등이 있습니다.
각각의 건물은 별도의 행랑이나 울타리로 둘러싸여 공간적으로 구분돼 있고, 재실은 원칙적으로 봉분이나 정자각이 있는 능 중심부에서 2, 3백 미터 이상 떨어진 동남쪽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궁궐과 마찬가지로 재실을 나온 왕은 마음을 정제하고 선왕이 계신 곳을으로 가기 위해 금천교를 건너게 됩니다. 이곳부터 제향공간이 되지요.
(2)홍살문(紅箭門)
홍살문은 능역의 가장 아래쪽 정자각 남측 향로·어로가 시작되는 곳에 신성구역임을 표시하기 위해 세워놓은 문입니다. 기둥을 양쪽에 세우고 위에 심방과 띠장을 가로지르고 가는 살을 약 15~24cm 간격으로 박고 중앙에는 삼지창과 태극문양 등을 새긴 형태와 구조를 지니고 있으며 지붕은 달지 않습니다. 동구릉처럼 왕릉이 군집되어 있는 경우 능의 초입에 외홍살문이 있으며 각 능마다 내홍살문이 따로 설치되기도 합니다.
(3) 배위(拜位)
배위는 홍살문을 넘어서자 오른쪽에 가로 세로 3미터 가량 돌로 편평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망릉위 혹은 판위로 불리기도 하는데, 왕이 왕릉에 왔음을 알리고 네 번 절하는 곳입니다.
(4) 참도(參道)
참도는 왼쪽이 높고 오른쪽이 낮은 두 개의 길인데 왼쪽 길은 왕릉에 묻힐 왕과 왕비가 다니는 신도(新道)이고 오른쪽 길은 현재의 왕이 다니는 어도(御道)로서 이 길은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박석(薄石)으로 깔려 있습니다. 궁궐에서는 임금이 최고의 자리지만 왕릉에 오면 그렇지가 못하네요.
(5) 수라간(水喇間)과 수복방(守僕房)
수라간은 제향이 있을 때 간단히 음식을 데우거나 조리를 하는 곳이고, 수복방은 능을 지키는 능지기가 임시로 머무는 곳입니다. 일반적으로 수라간은 정자각 서남쪽에, 수복방은 정자각 동남측에 위치하고 있으며, 보통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6) 정자각
정자각은 산릉의례를 위한 건물로, 정전(正殿)과, 배위청(拜位廳)이 결합한 丁자형 평면을 이루어 정자각(丁字閣)이라 부릅니다. 제사를 올릴 떄는 정저각의 문을 활짝 열어 제례를 취하였으며, 정자각 기둥에는 흰 색 띠가 둘러져 있습니다. 흰색 띠는 왕릉의 신비로움을 더하기 위하여 안개가 자욱한 날 정자각이 구름 위에 떠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함이라 합니다.
월대와 기단은 화강암으로 된 장대석을 쌓아 구성했으며 계단은 월대의 양 측면에 설치돼 있습니다. 동쪽 계단은 두 곳으로 나뉘며, 두 계단 중에 하나는 향로계(香路階, 운계)로 측면에 구름문양을 새긴 장식이 있는데, 향로라고 부르는 향을 모시고 가는 길과 이어집니다. 임금조차도 이 계단으로는 오르지 못하고 그 옆 간소하게 꾸며진 어로계(御路階, 동계)를 이용하여야 합니다. 서쪽 계단은 제사가 있을 때 수라간에서 준비한 음식물을 나르는데 이용되거나 제사가 끝난 후 축문을 태우기 위해 예감으로 축문을 들고 갈 때 사용합니다.
(7) 비각(碑閣)
무덤 주인공의 표석(表石)을 놓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것이 비각입니다. 표석은 보통 1.5미터 높이의 장방형 돌에 주인공의 호칭을 새기고 간략한 이력을 적는데 하부에 받침돌이 있고 위에도 화강석으로 기와지붕 형태를 다듬어 올려놓았지요. 비각은 보통 정면과 측면 각각 1칸의 간소한 규모이다. 벽의 하부는 전돌로 채워서 내구성을 높이지만 상부는 나무로 창살만을 내서 바람이 잘 통하도록 합니다. 지붕은 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이 일반적이었으나 맞배지붕으로 교체되었고, 숭릉에만 팔짝지붕이 남아있습니다.
(8) 예감과 산신석
예감은 정자각 뒤 서쪽에 돌로 네모지게 만들어 놓은 곳으로 정자각에서 제례후 축문을 태우는 곳입니다. 따로 소대 혹은 망료위라고도 부릅니다. 산신석은 정자각 뒤 오른쪽에 예감과 마주보는 위치 세워져 있는데, 장사를 지낸 후 3년간 땅에 제사를 올리는 곳입니다.
왕은 정자각에서 제를 올리고 정자각 서쪽 계단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제향공간입니다. 정자각 뒤로 신로가 이어지다가 자연스레 땅 속으로 잦아들게 됩니다. 선왕이 능침으로 가신 것처럼요. 이제는 능침공간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선릉의 능침공간 | 곡장과 능침 그리고 석물이 있는 상계구역 |
능침공간은 봉분이 있는 왕릉의 핵심 공간이지요. 봉분의 좌우와 뒷면 3면에는 곡장이 둘러져 있으며 그 주변에는 소나무가 둘러싸여 있다. 3단의 밋밋한 계단 형태로 되어있고 석물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9) 상계(上階) : 곡장(曲墻) - 능침(陵寢)/병풍석/난간석 - 석양/석호 - 혼유석(魂遊石) - 망주석(望柱石)
상계(上階) 또는 초계라고도 하는 가장 상단에는 흙을 둥글게 쌓아 올린 능침이 놓이며, 그 둘레의 하단에는 12방향을 나타내는 병풍석이 둘러져 있습니다. 표면에는 구름 모양 위에 십이지신상이 그려져 있어, 봉분을 장식함과 동시에 보호 역할을 하게 하였지요. 그 외부로 봉분의 울타리 역할을 하는 난간석이 둘러져 있는데, 난간석은 석주, 동자석주, 죽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난간석 바깥으로 두 쌍 혹은 네 쌍의 석호와 석양들이 능을 등지고 머리를 밖을 향해 놓여 있습니다. 석호는 호랑이 상으로 혹시 모를 악한 기운을 막아내기 위해서고, 석양은 본시 양이 죽은 이의 명복을 비는 힘이 있다는 풍습에 따라 설치되었지요.
그 외곽에는 풍수지리의 바람막이와 담장 역할을 하는 곡장이 이 모든 구조물을 감싸고 있으며 곡장 바깥으로는 언덕이 이어지는 데 이를 '잉'이라고 하여 왕릉 뒤의 주산에서 내려오는 기를 전달한다고 합니다.
병풍석과 난간석 | 네 개의 북모양 돌이 받치고 있는 혼유석 |
봉분 앞에는 혼유석(석상石牀)이 놓여 있고, 그 좌우에는 기둥 모양의 망주석이 있습니다. 혼유석(魂遊石)은 혼령이 노니는 돌이란 의미로 봉분에 누워 계신 영혼이 나와 쉬는 곳을 의미합니다. 북처럼 생긴 네 개의 돌이 받치고 있는데 이 돌에는 잡귀를 잡아먹는다는 귀신의 얼굴이 새겨져 있습니다. 혼유석 상판 표면은 현대기술로도 구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매끄럽게 다듬어져 있으며, 아래에는 박석이 깔려있어 영혼이 박석을 통하여 현궁으로 들어간다고 합니다.
망주석은 육신에서 분리된 혼이 육신을 찾아올 때 멀리서도 봉분을 찾도록 해주는 표지석입니다. 또한 망주석은 음양의 조화를 이루는 기능도 하며, 왕릉의 풍수적 생기가 흩어지지 않도록 막아준다는 설도 있습니다.
(10) 중계(中階)
중계(中階)의 가운데에는 8각면 혹은 4각면의 불을 밝히는 목적의 장명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왕릉의 장생과 발복을 기원하는 뜻으로 세웠지요. 그 좌우에 문인석 1쌍이 대칭적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문인석의 뒤나 옆에는 석마가 한 필씩 놓여 있다.
(11) 하계(下階)
하계(下階)에는 무인서 1쌍과 말 1쌍이 놓여 있다. 문치주의를 내세웠던 조선왕조의 특성상 문인석을 무인석 보다 한 단 높게 배치하였으나, 영조의 원릉에서부터 중계와 하계의 구분이 없어진 것은 무관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명망가의 인물 무덤에도 문인석을 세우는 경우가 있지만 무인석은 오직 왕릉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매년 왕과 왕비가 돌아가신 날 왕이 직접 왕릉에 행차하여 제례를 올리는데 이를 산릉제례라고 합니다. 지금도 정자각에서 산릉제례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3. 선릉에는 성종과 정현왕후가 동원이강식 묘역을 하고 있네요.
선릉은 조선의 사용설명서를 만들어 반포하신 제9대 성종과 계비인 정현왕후가 모셔져 있는 곳입니다. 세조를 이어 왕위에 오른 예종이 후사가 없이 1년만에 승하하자, 세조의 정비인 정희왕후가 의경세자의 둘째아들인 자산군을 예종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위를 잇게하지요. 이 때 나이가 13세에 불과하여 정희왕후가 7년 가까이 수렴청정을 하며 정사를 보살폈지요.
성종은 경국대전을 완성하고 성리학을 정착시켜 조선의 정치 기틀을 완성한 왕으로 추앙받게 됩니다. 성종은 세 왕비를 두었는데, 정비인 공혜왕후는 한명회의 딸로 성종이 즉위하던 해에 가례를 올렸으나 5년만 후사 없이 돌아가시게 됩니다. 파주 순릉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정비가 죽게되자 후궁인 윤씨가 왕비 자리를 이었으나 다른 후궁들과의 투기로 말미암아 폐비가 되고 맙니다. 바로 연산군의 비극을 싹트게 한 폐비 윤씨죠. 연산군은 왕위에 오르면서 선왕인 성종이 영면하게 될 묘역을 조성하게 됩니다. 왕릉을 조성할 때는 선왕의 생애와 혼인한 인물, 가계 등을 상세히 기록한 지문을 신하들이 작성하여 왕께 올리는데 이를 검토하던 연산군은 자신이 폐비 윤씨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지요.
정현왕후는 윤씨가 폐비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정현왕후의 아들 진성대군은 나중에 중중반정으로 연산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중종입니다. 선릉은 임진왜란 때 왕릉이 파헤쳐지고 재궁이 불태워지는 수모를 겪기도 하고 인조 3년엔 홍살문과 정자각이 불에 타 능참봉이 하옥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성종의 묘와 정현왕후의 묘가 하나의 정자각 뒤로 둘로 나뉘어 있는 동원이강식을 띠고 있습니다.
4. 세 분의 왕비를 멀리하고 중종 홀로 정릉에 묻히셨네요.
연산군을 몰아내고 조선 11대 임금으로 즉위한 중종은 성종과 정현왕후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셈이지요. 중종도 선왕인 성종과 같이 세 왕비를 맞았습니다. 첫째인 단경왕후는 가문이 중종반정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폐위되어 서인으로 살다가 일생을 마침니다. 하지만 영조에 의해 나중에 왕후로 복원되면서 양주에 있는 온릉에 모셔져 있습니다.
둘째 왕비 장경왕후는 인종의 모후인데 인종을 낳고 나서 바로 돌아가시게 됩니다. 고양에 있는 희릉에 모셔져 있습니다. 중종은 자신이 죽으면 장경왕후와 같은 곳에 묻히길 희망하여 희릉에 동원이강 형식으로 조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세번째 비이자 명종의 모후인 문정왕후가 중종 곁에 묻히길 원하여 고양에 있던 중종의 정릉을 현재의 장소로 옮겼지요.
하지만 명종은 선릉과 정릉이 있는 지역은 풍수적으로 능의 자리로 마땅치 않다고 여겨 문정왕후를 노원구에 태릉으로 조성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중종 정릉은 강남에, 단경왕후 온릉은 양주에, 장경왕후 희릉은 고양에, 문정왕후 태릉은 노원구에 각각 단릉으로 흩어져 있습니다.
조선시대 국장 절차
1. 고명(顧命) : 왕이 승하하기 전 왕세자와 대신들을 불러 유언을 남김
승하당일 2. 초종(初終) : 입과 코 위에 햇솜을 얹어 숨이 거두어졌는지 살핌
3. 복(復) : 내시가 왕의 곤룡포를 들고 지붕으로 올라가 '상위복"을 외쳐 떠나가는 왕의 혼령을 부름
4. 습(襲) : 곤룡포를 비롯하여 9겹의 옷을 입힘
5. 함(含) : 돌아가신 왕의 입 안에 쌀과 진주를 세번에 걸쳐 물림
6. 설빙(設氷) : 시신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사방에 얼음을 두름.
3일째 7. 소렴(小殮) : 강사포를 비롯한 19겹의 옷을 입힘
8. 치벽(治椑) : 왕이 즉위하던 해에 마련한 황장목으로 만든 관(재궁)을 손질함
5일째 9. 대렴(大殮) : 면복을 비롯, 90겹의 옷을 입히고 재궁에 안치함. 재궁 밖에는 도끼가 그려진 붉은 관의를 덮음
10. 성빈(成殯) : 왕의 재궁을 청룡, 백호, 주작, 현무가 그려진 찬궁에 안치
6일째 11. 성복(成服) : 왕세자, 대군, 왕비, 왕세자빈을 비롯한 대신들이 상복을 갈아입고 곡을 함.
12. 사위(嗣位) : 왕세자가 상복을 벗고 면복으로 갈아입고 국새를 넘겨받아 왕위를 이어받음
13. 치장(治葬) : 왕릉을 조성할 곳을 정하여 땅을 파서 현궁을 조성하고 석물을 배치
5개월후
14. 발인반차(發引班次) : 궁궐을 떠나 왕릉으로 모셔지는 절차. 발인에는 의장기를 비롯, 어보, 어책, 상여인 대여가 이어짐.
15. 천천의 : 왕릉에 도착하여 재궁을 현궁에 모심.
16. 반우반차(返虞班次) : 왕의 신주인 우주를 궁궐로 모시는 과정
17. 혼전우제의 : 왕의 신주인 우주를 궁궐 혼전에 모심
13개월후 18. 연제의 : 뽕나무로된 왕의 신주인 우주를 밤나무로 된 연주로 교체
25개월후 19. 상제의 : 승하한 지 만 2년이 되었을 때 연주를 모시고 치르는 제의
27갸월후 20. 부묘의 : 혼전에 모셨던 신위(연주)를 종묘에 모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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