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광화문 앞에는 행정중심인 육조거리가 있다.
궁궐은 왕과 왕실이 생활하는 절대공간인 반면, 경복궁의 남문인 광화문 앞에는 관료들이 실무를 보는 관청들이 들어서 있습니다. 이를 육조거리라고 하면 이들 관젗을 궐외각사라고도 불렀지요.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에 타 왕실의 주 무대가 창경궁으로 이어하였을 때도 여전히 육조거리는 건재하였지요. 육조거리는 해방이 된 이후, 과천 종합청사가 세워지기 전인 1970년대 까지 광화문 앞에 정부 관련 청사가 들어서 있었지요. 지금도 외통부나 문화부 및 일부 정부부처가 남아있잖아요.
육조거리는 광화문 서쪽에 예조 - 사헌부 - 병조 - 형조 - 공조가 있었고, 동쪽에 의정부 - 이조 - 한성부 - 호조 - 기로소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이 거리는 임금과 백성이 만나는 접점이고, 백성의 여론이 모이고 다시 퍼져나가는 광장이었지요.
여기서 육조의 각 관청의 역할을 오늘날의 정부부처와 대비하여 보지요. 의정부는 국사를 의결하는 최고 행정기관으로 국무총리실이구요, 이조는 인사를 담당하는 안전행정부, 호조는 나라의 재정과 경제를 관장하는 기획재정부, 예조는 의례와 과거시험,외교를 담당하는 문광부, 교육부, 외교통일부와 유사합니다. 병조는 군사와 국방을 담당하는 국방부, 형조는 사법기관인 법무부, 공조는 국토를 관리하고 건축, 토목을 담당하는 국토교통부, 사헌부는 임금에게 조언을 하고, 관리를 감찰하는 감사원이지요.
육조거리 한가운데 한성부가 있는데, 도읍인 한양을 책임지는 관청으로 서울시청이지요. 서울시장격인 한성판윤은 정2품으로 육조의 판서와 동등한 품계입니다. 판윤 밑에 좌윤과 우윤이 있는데 지금의 정부부시장과 행정부시장 역할과 똑같지요. 지금도 서울시장은 장관과 동등한 지위를 가지면서 중앙정부 장관회의에 참석하니 그때나 지금이나 요직은 요직입니다.
2. 조선시대 관료의 하루
조선시대에는 지금처럼 일을 하는 주중일과와 주말 휴식의 개념이 없었지요. 요일제는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4등분하여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시작한 요일제가 문헌에 기록된 것은 성경이었고, 현재와 같이 각기 이름을 달리 붙여서 사용된 것은 로마 콘스탄티누스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승인하면서 부터라네요. 이름은 일곱 행성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월요일은 달에서 와서 Monday, 당연히 일요일은 태양에서 왔지요.
우리나라에 요일제가 도입된 것이 1895년 갑오개혁 부터입니다. 이름은 만물을 구성하는 것에서 따와 붙었지요. 갑오개혁 이전까지는 요일제가 없으니 당연히 주말이 없었지요. 4절기마다 있던 명절이 그나마 쉴 수 있는 날이었으니 일년에 겨우 보름도 안되었다고 합니다. 일년에 100여일을 쉬는 요즘에 비하면 정말 일개미였네요.
하루의 일과는 어떠하였을까요? 농경사회는 해가 뜨면 일터로 나가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오지요. 당시 관료도 이러하였다고 합니다. 여름에는 12시간을 넘게 일해야 하고, 겨울에는 그나마 짧았네요. (출근은 묘시, 5~7시. 퇴근은 유시, 5~7시지만 겨울엔 신시로 3~5시)
이러하니 격무에 지친 일부 관료는 지각과 조퇴 때로는 결근하는 관료가 있어 이를 어떻게 벌해야 할지도 가끔 논의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3. (격쟁) 백성이 억울한 사정을 어떻게 임금님께 고할까?
글을 모르는 평민이나 천민이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는 방법은 신문고가 있었는데, 복잡한 절차와 궁궐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장소의 제약으로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였습니다. 또 하나의 방법이 있었지요. 왕이 궐밖으로 행차를 나갈 때 징이나 꾕과리를 친 뒤 억울한 사연을 호소하면, 이를 들은지 3일 이내에 왕에게 보고하도록 하였고, 필요하면 암행어사나 관리를 파견하여 처리토록 하였다고 합니다. 격쟁이라고 하는 소원제도인데, 소통을 중시하던 정조 때에는 격쟁 건수가 1,300여건으로 이전보다 두 세배에 이르렀다네요. 지금은 돈이 법보다 더 무서워 호소할 곳도 없는 데...
3. 조선 제일의 번화가, 雲從街
요즘 방영되는 드라마, 옥중화의 주무대는 감옥인 전옥서이지만 이야기의 중심은 시전상인 사이의 주도권 다툼이지요. 흥인지문에서 돈의문을 가로지르는 거리에는 시전상인들이 물건을 사고 팔 수 있게 나라에서 장랑을 지어졌습니다. 본래 시장은 사람이 모여드는 곳으로 자연스레 운종가로 불리게 되었지요.
시전은 본래 왕실과 관청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역할에서 점차 민간 판매가 늘어나면서 나라에 일정 세금을 내는 댓가로 자유로이 물품을 판매하여 부를 축적하는 기회가 되었지요. 이들 시전상인에게는 나라가 요구할 때 기부금을 내는 조건부로 금난전권이라는 특권을 부여받았지요. 즉 전권을 허여받은 시전이 취급하는 물목을 다른 시전상인이 취급할 수 없게 만들어주었지요. 처음엔 육의전에 해당하는 물목에만 한정하였으나 나중에는 일반 물목에 까지 확대되어 주도권 다툼이 잦아지자 정조는 금난전권을 폐지하여 자유경쟁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육의전은 비단을 취급하는 선전, 명주를 취급하는 면주전, 무명 옷감을 취급하는 면포전, 과거시험에 필요한 종이를 취급하는 지전, 삼베류를 취급하는 포전, 어물을 취급하는 어물전 등이었지요.
4. 운종가를 상징하는 이들.. 여리꾼과 전기수
운종가에는 독특한 거래관행이 있었지요. 금난전권을으로 인해 굳이 화려한 간판이나 상품을 진열대에 전시해 놓고 손님을 끌어모을 필요가 없었지요. 공급이 수요를 좇아가지 못하는 독점이나 과점 경쟁체제이나 당연한 결과지요. 하지만 이 와중에도 흥정을 부추켜 차액을 챙기는 전문 호객꾼이 있었는데 이를 여리꾼이라고 합니다. 운종가 거리에서 붉은 옷을 입고 있는 이들은 그들만의 은어인 변어를 사용하여 일반인이 흥정가액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수단을 썼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3을 부를 때는 王不柱요! (王자에서 기둥을 빼면 三), 다섯을 부를 때는 吾不口요! 라고 하였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시장에서 물건을 파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출난 재주를 뽐내면서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들이 있지요. 그 중에서 이야기나 소설을 아주 맛깔나게 청중들 앞에서 풀어내는 재주를 가진 사람을 전기수라고 합니다. 이들의 이야기가 어찌나 실감나던지 그만 이야기에 빠져 살해당하는 사건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시장에서 일반인을 상대로 구연하기도 하지만 가가호호 방문을 하여 구연하고 의식주를 제공받았다고 합니다.
5. 보신각 종소리에 한성의 하루가 열리고 닫히네.
보신각의 조선시대 이름은 종루였지요. 1895년에 지금과 같이 보신각으로 불렸습니다. 종루에서 울리는 종소리에 맞추어 도성의 성문이 열리고 닫혔지요. 궁궐의 자격루에서 알려준 표준시보를 받아 종루와 숭례문, 흥인지문에 달려있는 종을 두드려 하루를 열고 닫았습니다.
매일 새벽 4시 33번의 종을 두드려 통금 해제를 알리는 파루. 매일 밤 10시 28번 종을 두드려 통금을 알리는 인정. 그리고 구궐에서는 12시를 알리는 북소리에 오전 업무를 마치고 점심을 먹게 됩니다. 통행금지에 걸리면 즉결처분되어 곤장이라는 형벌을 맞았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시간은 하루를 12간지로 나누어 매 두시간 마다 종을 울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밤 시간에는 해가 질 때부터 해가 뜰 때까지를 다섯등분으로 나누어 이를 경이라 부르고, 다시 경을 다섯 등분으로 나누어 점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리고 먀 경이 지나면 그 숫자대로 북을 울렸고, 점이 지나게 되면 점의 숫자대로 징을 울렸다고 합니다.
그러면 아래에 나오는 밤의 시각을 보고 무엇을 멏번 두드렸나 맞추어 보세요.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데
일지춘심은 자귀야 알랴만은
다정도 병인 양 하여 잠못들어 하노라"
6. 전문직의 마을 중촌
조선시대 중인계급은 양반과 평민의 중간계층으로 대개 역관, 의관 등 전문직 종사자를 말하죠. 이들은 청계천과 종로 일대 중촌이라 일컽는 곳에 주로 거주하였습니다. 첩의 자식인 서얼은 관직에 오르기가 어려웠지요. 드라마 옥중화에 나오는 윤원형의 서자인 윤태원이 평시서 주부(5품계)에 오르는 경우는 특별한 경우에 해당되지요. 서얼들이 관직에 오를 수 있도록 차별을 철폐하여 줄 것을 청원하는 소위 '통청운동'이 일어나 집단 상소를 올리기에 이르렀지요.
중인들 중에서 역관의 집안은 대대로 그 관직을 이어오게되었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역관 집안인 무안 박씨의 경우입니다. 지금은 동시통역관이나 의사, 변호사등이 사회의 상류계급을 이루었는데, 선조 때에 장원으로 역관이 된 박대근과 그 후손들은 대대로 역관 관직을 이어왔습니다. 20세기에 들어 그의 후손 중 박재순이 독일어를 전광하여 관립 독일어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는 상장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역관들의 교재였던 중국어 역서]
7. 남산골 딸깍발이
목멱산 아래에 남산골에는 청렴한 관원들과 고고한 선비들이 자리잡고 살았던 곳입니다. 학문은 높았으되 살림이 풍족하지 못하여 장마에 신고다니는 딸깍발이를 아무 때나 끌고 다니면서 딸깍거리는 소리를 내고 다닌 데서 유래한 딸깍발이는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선비를 이르는 말이 되었지요.
이들 집안은 남산에서 솟아오르는 맑은 물로 술을 빚어 풍월을 즐겼다고 합니다. 당시 북촌에는 풍족한 살림을 기반으로 철마다 떡을 빚어 먹으니 이를 두고 '南酒北餠'이라고 하였다네요.
남산 아래에는 한양도성 정문인 숭례문이 서있는데, 삼남지방에서 올라오는 5갈래 길이 이곳으로 모아집니다. 따라서 자연스레 삼남에서 올라오는 물목들이 숭례문을 통해 운종가로 흘러들어가고 이곳에도 시장이 열리게 됩니다. 오늘날 남대문 시장이 이 때부터 형성된 것은 당연한 이치겠지요.
8. 도성 밖의 한양, 성저십리
행정구역상 한성부는 도성 밖 십리까지를 포함하는 구역인데, 이곳은 요즘의 Green Belt와 같은 금장구역(禁葬區域)으로 지정되어 벌목마져 금지되었지요. 조선 초기에는 이런 이유로 사람이 사는데 불편함이 많았으나. 조선 후기로 넘어오면서 한성에 인구 유입이 늘어나 점차로 이 지역에 사는 인구가 늘어나게 됩니다. 또한 상업이 점차 활성화되면서, 근교 농업이 발달되어 도성 안에 수확한 물목을 공급하는 기반기지로 상장하게 됩니다. 왕십리에는 무우가, 청파동에는 미나리, 에태원에 토란, 연희동에 고추와 부추가 주 수확물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한강은 삼남에서 올라오는 세곡과 상품들이 하역하는 부두역할을 하였습니다. 광나루에서 양화진까지 강변에서 올라온 물건을 받아 거래를 주선하고 이를 운종가에 운송하는 역할을 하는 상인을 경강상이라고 불렀지요. 이들은 조소ㅓㄴ후기로 넘어오면서 전국의 유통망을 장악하여 상당한 부를 축적하는 거상이 되었다고 합니다. 정부에서는 이들을 관리할 관공서를 설치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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