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울의 역사
1392년 7월 17일 태조 이성계는 역성혁명을 통해 조선을 세웠지요. 개성 수창궁에서 즉위한 지 한 달도 되지않아 천도를 결심합니다. 남경에 남아있던 옛 궁을 수리하여 천도하려는 계획이 신하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던 차에 태실의 길지를 찾으러 갔던 권중화가 계룡산을 도읍으로 추천합니다. 무학대사와 함께 계룡산을 둘러보고 바로 궁궐 중수를 명합니다. 하지만 이마져도 하륜이 제기한 풍수지리상 약지(弱地)라는 이유를 들어 계획을 접고 맙니다.
이에 태조는 하륜에게 명하여 새로운 도읍지를 찾을 것을 명합니다. 하륜은 지금의 서대문구에 있는 안산을 추천하지요. 하지만 이 곳 또한 반대에 부딪혀 다시 찾은 곳이 지금의 경복궁이 앉아있는 곳을 조선의 도읍지로 정하고 궁궐을 짓기 시작합니다.
새 왕조가 들어선지 2년만 인 1394년 10월 한양으로 천도를 하면서 서울이 역사의 중심에 서게 됩니다. 한양이 새 도읍지로 결정된 이유는 세가지. 첫째,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해 있어 각 지역 백성들이 왕래가 용이한 곳이지요. 둘째,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면서 바다가 가까이에 있고, 남쪽으로 한강이 흐르니 군사적인 요충지로 충분한 지세를 갖추고 있을 뿐더러, 마지막으로 강과 바다가 인접하였으니 수상교통의 편리함마져 용이한 지역입니다.
2. 서북쪽으로 십리만 가봐!!
태조 이성계의 성화에 새 도읍터를 잧아다니던 무학대사가 왕십리 지역을 지세를 살피고 있는데, 소를 타고 지나던 노인이 혼잣말로 중얼거리길,
"이놈의 소는 미련하기가 무학같구나. 어찌 좋은 자리를 놔두고 엉뚱한 곳만 찾아다닐꼬....."
이 소리를 듣던 무학 대사는 노인에게 다가갔죠.
"노인장께서는 소승이 무학이라는 걸 아시면서 하신 말씀같사온데, 혹여 좋은 길지가 어딘인지 소승에게 말씀을 해주실는 없을런지요??"
"서북쪽으로 십리만 가면 명당자리가 있을 터이니 한번 가보시게"
하고 가던 길을 재촉하였지요. 무학대사는 노인이 짚어준 대로 서북쪽으로 십리가량 가서 백악에 올라보니 새 도읍의 더로 손색이 없었지요. 그래서 왕십리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답니다.
3. 한양의 건설 - 무학대사의 저주(?)
도읍지가 정해졌으니 비로소 궁궐을 지을 자리를 정해야 하지요. 정궁의 위치를 놓고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동쪽으로 잡을 것을 주장한 반면, 정도전은 제왕은 남면하여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주장이 맞서게 됩니다. 결국 태조는 정도전의 손을 들어주었지요. '주례도감'의 원리에 따라 백악산을 주산으로 정궁의 위치를 잡고 동쪽엔 종묘를 서쪽엔 사직단을 새웠지요. 조정의 주요 관청은 광화문 앞에 좌우로 배열토록 하였습니다. 철저히 유교이념과 통치원리에 입각한 결과지요.
한양을 둘러싼 내사산인 백악산(북) - 인왕산(서) - 목멱산(남) - 타락산(동) 을 잇는 도성까지 축조되어 명실상부한 조선의 도읍으로 손색이 없는 도시로 우뚝서게 됩니다. 내사산을 다시 한겹으로 에워싸고 외사산은 북한산 - 덕양산(행주산성이 있는 곳) - 관악산 - 아차산이 두르고 있어 양겹으로 싸인 지세를 자랑합니다.
정도전과 무학대사 사이에 정궁의 방향으로 놓고 논쟁을 하였는데, 요지는 백악을 주산으로 하여 궁궐의 방향이 남면을 하게 되면 관악산의 화기가 뻗혀 200년 뒤에 큰 변란을 겪게 될 것이니,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여 백악이 가진 청룡의 기운을 빌어 화기를 잡을 수 있다고 하였지요. 무학의 주장이 옳았는지는 모르지만 건국한 지 200년이 되던해 여름 선조는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경복궁을 버리고 의주로 피신하는 변란을 겪게 됩니다.
3. 북궐과 동궐사이엔 조선의 노블리스(Noblesse) 북촌이 있다.
조선시대 문관 관료로서 4품 이상을 대부, 5품 이하를 사(士)라고 하였으나, 일반적으로 문관 관료뿐 아니라 문무 양반관료 전체를 포괄하는 명칭으로도 쓰였지요. 사대부 양반은 계급사회였던 당시에 상당히 많은 특권과 혜택을 누렸지요. 특히 경복궁과 창덕궁 사이에 형성된 북촌에는 고위관직을 차지하고 있는 관료들이 집합적으로 모여 살고 있었습니다. 두차례의 참혹한 전쟁을 치른 조선 후기는 노론이 정부의 권력을 독점하고 있었지요. 바로 노론들의 주 거주지가 북촌이었습니다.
조선의 노블리스로 북촌에 살고 있는 이들을 경화사족(京華士族)이라고도 부르기도 합니다. 성리학적 질서를 추구하고 대의명분을 중시하며 명나라에 대한 사대주의에 매몰되어 있던 이들도 명이 무너지고 청나라의 간섭을 받게되면서 점차 바뀌게 되지요. 청나라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청에서 유입된 북학, 고증학과 서구 선진문물을 수용하게 됩니다. 아울러 서화나 골돌품 등에 호감을 갖고 중국에서 들어오는 사치스런 기물 수집에 열성을 보이기도 합니다. 점차 당파적인 논쟁보다는 새로운 문물과 문화 트렌드에 점차 심취해갑니다. 이들이야말로 조선의 정치사회를 주도하면서 동시에 보다 앞선 문화를 선도하고 향유하는 최상위 계층이었지요.
하지만 이들 중에서 가세가 기울어지면서 가지고 있던 골동품이나 서화들을 내다 팔아 생계를 이어야 하는 어려운 형편에 놓인 사대부도 있었지요. 이들이 내다 판 골동품이 주로 거래되던 곳이 북촌 마을 앞에 있는 인사동이었습니다. 그 명맥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면서 또 하나의 서울의 명소자리를 지키고 있지요.
4. 조선시대 신분증, 호패
호패제도는 고려 공민왕 때 원나라의 제도를 처음으로 도입하였습니다. 이를 전국적으로 실시한 것이 조선 태종 때입니다. 인구수를 파악하고, 신원을 증명하면서 나아가 세금을 부과하는 유용한 제도입니다.
호패는 신분과 계급에 따라 재질과 기재사항이 달랐지요. 2품 이상과 삼사의 관원은 상아로 만든 아패가 관청에서 제작에서 지급하였고 나머지는 각자가 호패를 제작하여 관청에 제출하여 낙인을 받은 다름 사용하였습니다. 3품이하는 각패, 생원진사는 황양목패, 잡직이나 서인, 서리는 소목방패, 노비는 대목방패로 만들었습니다.
기재내용도 계급과 신분이 낮을수록 기재사항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2품이상은 관직과 이름만 적혀있는데 반해, 노비의 경우 연령, 거주지, 얼굴빛, 키, 수염여부, 주인이름 등을 기재하였습니다. 일반백성은 이름과 거주지, 얼굴빛과 수염여부를 기재하였지요. 사진에 있는 심의풍은 이름, 출생년, 벼슬에 나선 해, 그리고 과거에 급제한 연도와 과목이 기재되어 있습니다.
다음에는 육조거리를 비롯해 운종가와 중촌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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