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문화유산 이야기/21. 궁궐이야기

[고궁박물관] 3. 1층엔 조선시대 천문과학과 대한제국이 소개되고 있죠

학이시습지야 2016. 9. 22. 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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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궁박물관 1층 전시실 한가운데에 두 대의 자동차가 우리를 반기고 있습니다. 디자인과 장식이 다소 유난스럽지 않은 것이 순종황제 어차이고 그 옆에 있는 것이 순정효황후 어차입니다. 순종황제 어차는 1918년 미국 GM이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고, 순정효황후 어차는 1914년 독일 다임러가 제작한 리무진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에 자동차가 처음으로 도입된 것은 언제였을까요? 1903년 고종황제 망육순을 기념하여 해외 사절을 모시고 열병식에 사용하기 위하여 미국 포드사에 주문하여 들여왔다고 합니다. 하지만 망육순 행사는 러일전쟁으로 치러지지 못하였지요. 그리고 당시 들여온 자동차도 1904년 경운궁 화재와 함께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민간인으로 처음 자동차를 구입한 사람은 천도교 교주였던 손병희가 캐딜락을 1904년 들여와 운행하였다고 하네요. 


1. (대한제국과 황실실) 짧고 숨가빴던 대한제국 13년의 역사

  을미사변으로 일제로 부터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합니다. 일년 반 만에 경운궁을 개창하여 환궁한 고종은 1897년 청나라 간섭을 벗고 청나라 및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자 하는 열망에 대한제국을 선포합니다. 제국 선포와 함께 광무개혁을 단행합니다. 그 근간은 서구 열강과 어깨를 견주기 위해 구본신참, 즉 옛 것을 근본으로 삼되, 서구 근대문물 도입에 박차를 가하지요. 


근대화의 씨앗을 튀우려는 노력 : 전화, 전차, 철도, 통신 기반 시설 도입

  1895년 우정총국(지금의 우체국)을 개설하여 전화와 우편통신망을 구축하지요. 1887년 건천궁에는 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한 지 불과 십년도 되지 않아 전등불이 켜져 당시에 많은 화제거리를 낳았지요. 전기보급을 활성화하기 위해 왕실이 투자한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하고, 서대문에서 청량리간 전차가 1889년 시운전을 하기에 이름니다. 뉴욕에 전차가 도입된지 십년도 안되어서이고, 이는 일본보다도 앞선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멈추지 않고 서울 인천간 철도가 1900년 부설되어 운행을 개시한 이래, 경부선, 경의선, 호남선, 경원선 등이 차례로 부설 준비를 하게 됩니다. 정부산하 철도국과 민간 업자까지 회사를 나섰지만, 일본의 집요한 방해와 자본 및 기술 부족으로 결국 일본에 부설권이 모두 넘어갔지요.



























세계 만방에 대한제국 이름을 알리다 : 파리 만국 박람회 출전 및 여권 발급

  189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이후 미국, 영국, 러시아, 독일, 프랑스 등과 조약을 체결하고 서구의 기술자, 고위 관료, 학자들을 대외 고문으로 초빙함을 물론 통신사 및 사절단, 유학생을 파견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 정책을 펼쳐나갑니다. 전시된 유물 중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 조선을 대표하는 전시관을 개설하였다는 당시 신문기사와 박람회 안내도가 있습니다. 당시 파리 박람회가 열렸던 곳은 바로 에펠탑이 서있는 자리입니다. 그 자료 옆에는 개인에게 발급한 여권과 당시 선교사나 외국고문들이 조선을 여행하며 기록한 책자도 함께 전시되어 있지요.



 


















  파리만국박람회 관련자료를 지나면 통천관과 강사포를 입은 고종황제의 어진을 볼 수 있습니다. 1918년에 찍은 사진을 보고 그린 어진입니다. 44년간의 재위기간은 역대 어느 임금보다도 파란만장한 격동의 시절을 겪은 임금이자 황제였지요. 명성황후와 아버지 대원군 사이에서 부단히 조선의 근대화를 이끌고자 노력하였던 권력자. 

  그러나 일제의 강제병합 부당성을 부단히 서구 열강에 알리고, 조선의 자주권을 되찾아 오려는 몸부림은 을사오적에 의해 참담하게 무너지고 말았지요. 그의 노력과 의지가 백성을 일으켜 세웠나요? 그의 인산일에 3.1만세 운동이 일어났고, 상해에는 조국 광복을 위해 임시정부가 수립됩니다.


2. (천문과학 1실) 백성이 먹을 식량을 위해 천문을 읽다.

  고대부터 왕의 역할 중 하나는 해와 달의 움직임, 계절에 따른 별자리의 변화 등을 통해 시각과 절기를 정확히 알아내는 것입니다. 이는 나라의 생산력이 농업에 치우친 여건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지요. 따라서 조선의 왕들은 천문 현상을 관찰하고 분석하여 통치에 활용하는 데 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태조는 고려의 제도를 계승한 서운관書雲觀을 두어 천문현상을 관측하고 이를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기게 하였습니다. 세종 대에 천문학의 황금시대를 이루어 천체에 대한 관측과 천문도 제작, 천문 관련 서적의 발간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주요 천문 관련 기기로는 천체의 운행을 측정하는 대간의大簡儀·소간의小簡儀, 천체의 위치와 적도 좌표를 관측하는 혼천의渾天儀, 주야 겸용의 천체 관측기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얻어진 천문학적 지식의 주요 성과는 천문도天文圖로 집대성되었고, 조선의 독자적 역법인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이 간행되었습니다.


남북반구 별자리판 平渾儀 : 둥근 황동판 앞뒤에 각각 북반구와 남반구의 하늘에 나타난 별자리를 표현하여 절기와 계절의 변화를 측정했던 천문관측기구이다. 판의 둘레에는 360˚의 눈금과 십이지, 중요 별자리 이름, 24절기가 표시되어 있다. 원판 가운데의 지평판地平板을 회전시켜서 매일 보이는 하늘의 영역을 표시할 수 있다.


별자리 지도를 새긴 돌( 天象列次分野之圖刻石) : 이 각석은 태조 이성계의 즉위 후 조선의 개국이 하늘의 뜻에 의한 것임을 밝히고, 천명을 경건하게 받들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적으로 알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태조 이성계의 명으로 서운관(書雲觀)의 천문학자들이 오래 전에 평양성에서 사라진 '돌에 새긴 천문도[천문도석각(天文圖石刻)]'의 탁본을 기초로 하여 새로이 당대 하늘의 별자리 위치를 측정한 내용을 반영하여 1395년에 완성하였다.

 天象列次分野之圖 목판본은 선조4년(1571년) 각석을 목판에 새긴 것입니다. 천상은 하늘의 형상으로 별자리를 말하고, 열차는 천구를 적도를 따라 12차로 나누어 차례로 배열한 것을 말합니다. 분야는 지상의 구역을 별자리와 연관해서 나눈 것을 의미하지요. 결국 이는 '하늘의 별자리를 12차와 분야에 맞추어 차례로 배열한 천문도'입니다. 이 지도는 중국이 가지고 있는 '순우천문도'와 차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국 지도는 별의 크기와 밝기가 일정한 데 반해, 이 지도는 별의 크기와 별빛의 세기에 따라 다르게 표현하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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