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문화유산 이야기/21. 궁궐이야기

[종묘]궁궐 건축의 진수가 담겨있는 종묘

학이시습지야 2017. 12. 19.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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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록이 녹음을 짙게 드리우는 어느날 종묘를 찾았다. 

  종묘하면 조선시대 임금님들의 신위를 모셔놓고 해마다 제례를 올리는 사당 쯤으로 생각해 그다지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당길 만한 매력을 품고 있지 않다고 여겨져 왔던 공간이다. 종묘 안을 거닐 때도 사람들과 부대끼기는 커녕 오히려 정숙과 고요가 전각들 사이를 흐르고 있다. 왁자지껄한 경복궁보다 훨씬 조용하다 그렇다보니 지나는 사람들 발검음과 목소리도 거의 들리지 않는다. 사실 종묘는 이래야지 않을까. 왕과 왕비들의 혼이 깃들어 있는 정전에 사람들의 왁자지껄은 오히려 종묘에 내려앉아있는 엄숙함과 고요함을 흐트러버려 본래 가지고 있는 가치를 맛볼 수 없다. 


  경복궁보다 먼저 종묘를 완공한 이유!

  종묘는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혼을 모신 사당으로 일종의 신전이다. 유교에서는 인간이 죽으면 혼과 백으로 분리되어 魂은 하늘로 올라가고, 魄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무덤을 만들어 魄을 모시고, 사당을 지어 魂을 섬기는게 당연한 예법이 되었다. 유고를 이데올로기로 삼은 조선은 역대 임금의 신주를 모시는 것으로 백성들에게 효의 모범을 보이는 아주 중요한 율법이 되었다.

  이를 증명하듯 한양으로 천도를 결정하면서 경복궁 완공보다 3개월 앞선 1395년 9월에 태조 이성계의 4대조 추존왕인 목조(고조), 익조(증조), 도조(조부), 환조(부친) 신위를 종묘를 봉안하였다. 궁궐 축조를 규정한 유교 경전 중 하나인 '주례'의 고공기에 따르면 궁궐의 왼쪽에 종묘를 오른쪽에 사직을 세우라고 하였다. 사극에서 임금과 신하가 어지러워진 국정을 다툴 때 늘상 입에 올리는 "종사를 어찌 지키려고......", "종묘와 사직을 보존하고...."하는 표현이 나온다. 결국 종묘가 가장 우선시 되었고, 그만큼 중요시하였다고 한다.  


至此 大小人員下馬碑 - 여기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가야하느니.....

  궁궐 정문 앞에는 하마비가 세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흔적을 볼 수 있는 곳은 여기 종묘전교 앞이다. 덕수궁에도 하마비가 서있지만 제위치가 아니라 대한문 안으로 옮겨져 서있다. 원래는 대한문 밖에 있어야 한다. 하마비는 쓰여있는 그대로 궁궐이나 종묘를 들어갈 때 타고 온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 걸어들어가는 하는 엄정한 곳을 표시하는 비석이다. 


  이 하마비에서 부터 바로 종묘권역이 시작된다. 하마비에서 내려선 사람들은 이내 다리를 건너게 된다. 종묘전교라고 불리는 다리로 일명 금천를 건너는 다리인 셈이다. 마음을 가다듬고 맑은 정신으로 참배토록 금천에 흐르는 물로 심신을 정제하여야 한다. 궁궐에 들어서면 마주하게 되는 금천교와 다를바 없는 역할이다.


궁궐에는 임금이 지나는 어도, 종묘에는 선왕의 혼이 지나는 신도가 우리를 안내한다.

  우리의 문화유산을 찾아보게 하는 마력을 지닌 유홍준교수는 종묘에 오려면 늦은 가을 얇은 눈이 살포시 내려앉은 토요일 오후로 잡으라고 권한다. 마침 내가 찾은 날은 5월의 토요일 오후였다. 종묘를 에두르고 있는 녹음이 한참 짙어질 무렵이다. 계절은 다르되 요일과 시간은 맞추었다. 더불어 외사문을 지난 전각을 차례로 보지 말고 이내 신도를 따라 정전까지 바로 갈 것을 권하기에 나도 이내 정전으로 향했다. 외서문에서 시작된 신도는 정전, 영녕전까지 거침없이 이어진다. 궁궐에는 살아있는 권력의 중심인 임금이 걷는 어도가 광화문에서 정전인 근정전까지 곧게 이어진다.


  어도는 가운데 약간 돋아진 길 위로 임금만이 걷고, 오른쪽에 문신이 왼쪽에 무신이 걸어들어가게 되어있다. 하지만 임금의 선왕들로 혼이 모셔져있는 종묘에는 선왕의 혼이 지난다 하여 신도라고 하고 가운데로 선왕의 신위가 지나간다. 그 옆으로 오른쪽편에는 임금이 왼편으로 왕세자가 한걸음 뒤에서서 걸어간다. 살아있는 권력의 중심인 임금도 여기 종묘에 와서는 선왕에게 지존의 자리를 비켜주어야 한다.

  외대문에서 곧바로 정전으로 신도를 따라 걸어가다보면 재궁에서 갈림길이 나온다.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정전을 가리고 있는 긴 담장이 이어지고 어느덧 정전으로 올라설 수 있는 남신문이 우리를 맞이한다. 단청을 걷어낸 자리에 붉은색을 입혀 엄정함을 풍기는 맞배지붕 아래로 들어서면 넓고 나직한 월대가 곧게 뻗어있다. 근정전을 받치고 있는 월대보다 간결하지만 장중하게 정전을 에두르고 있다. 월대 위 넓은 공간에 고작 서너명의 관람객이 조용히 정전을 바라보고 있는데 차라리 그 정경이 나아보인다. 사람들로 왁자지껄한 모습은 종묘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가로 100여미터 세로 80여미터에 이르는 기품을 뽐내는 월대 위로 길게 드리운 맞배지붕이 월때까지 내려앉을 듯이 서있다. 월대와 정전은 가로세로 질서 정연하게 공간을 연출하고 있지만 구획된 평면을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답답하게 강직된 긴장을 풀어주려는 여유가 배어있슴을 찾아볼 수 있다. 월대 위의 넓직한 평면 공간에는 자연석을 비슷한 크기로 잘라내는 손질만 한 박석이 다양한 모양으로 쏟아져 내리는 햇빛을 받아내고 있다.


  가운데 약간 검은 돌로 정전까지 이어주는 향로를 따라 걸어가본다. 상월대로 올라서서 정전의 각 신실을 굳게 닫고 있는 문과 문을 기웃거리면서 월랑을 걸어가보았다. 헌데 양쪽으로 난 문중 하나가 어긋나 있다. 마치 젖은 목재가 마르면서 비틀린 것처럼 문짝이 어긋나 있다. 지엄한 임금의 명을 받들어 지어진 종묘가 신실을 닫고 있는 문들이 비틀린 것이라면 공사를 감독한 책임자는 벌을 받아도 수없이 받았을터.

  하지만 비틀려 있다기 보다는 일부러 약간 어긋나게 지어진 것같다. 나무로 지어진 건물은 사람이 들어와 함께 온기를 나누고 살아야 하지만 이곳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신들이 입주해 있지 않은가. 그래서 자연통풍을 통해 건물을 오래동안 보존할 수 있도록 설계하다보니 이러한 과학적인 묘수를 적용하였다고 한다. 


  종묘에는 모두 36분의 조선의 왕과 추존왕의 신실이 들어와 있다. 그중 정전에 19개의 신실이 영녕전에 17개의 신실이 마련되어 있다. 태조 이성계를 필두로 순종까지 27분의 임금에다 태조의 4대조 선조  추존왕 4분, 그 이후로 방계에서 등극한 임금의 부친을 추존왕으로 모신 5분에다 효명세자 그리고 일제에 의해 끌려간 마지막 조선의 왕실이었던 영친왕까지 전부 38분의 신위가 정전과 영녕전에 모셔져 있어야 한다. 하지만 두 차례 반정으로 왕위에서 밀려난 연산군과 광해군은 아직도 종묘에 모셔져 있지 않다. 그래서 전부 36분의 왕을 모신 신실에 왕비와 계비가 함께 하고 있다. 


  개국초에는 제후국의 왕은 5대 종사의 원칙에 따라 5개의 신실로 건축되었으나 훌륭한 업적을 남긴 왕의 신위를 옮기지 않는다는 불천위 제도를 들어 돌아가신 선왕의 혼을 모신 신실이 계속하여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조선 후기 헌종조에 마지막으로 증축하였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이때 증축한 신실이 모두 채워지면서 조선은 일제에 나라를 빼았기고 종묘에는 더이상 돌아가신 왕의 혼령이 들어올 일이 없게된다. 헌종조에 이미 조선의 종말을 예견한 것인가?    


 신록의 푸르름이 다할 즈음의 어느 초겨울 토요일, 하얀 눈이 소복히 내린 날 오전에 종묘를 다시 찾아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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